"만일 신이 내 어머니의 벌반만큼이라도 나를 사랑해 준다면 나를 지옥으로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전부다. 이것이야말로 내 의식의 최종적 사실이다. 어느 종교에 대해서도 나는 이 진리를 부정할 수는 없다."
린위탕(임어당)
린위탕1895~1976)
=소설가이자 수필가이자 언어학자다. 복건성에서 상인출신 기독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이상주의자이며 낙천주의자였던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영어에 관심이 많아 상해 성요한대학에서 언어학을 공부했다. 북경 청화학교 영어교사로 3년을 마치고 미국 하버드대학 비교문화연구소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나 지원금이 끊기는 바람에 프랑스로 건너가 중국인 이주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 후 독일 예나대학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문학비평과 음운학을 가르치면서 왕성한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에 노신을 만나 그에게 많은 감화를 받는다. 군벌통치의 폐해를 고발하는 노신의 사상에 호응하면서 둘은 모든 군벌의 지명수배자가 되어 베이징을 떠나 복건성 하문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신과 교류한 이 시기는 린위탕의 문학 생애에 있어서 가장 진취적인 시기였다.
1930년대부터 중국어 외에도 영어로 글을 쓰고 발표했다. 1936년 뉴욕으로 갔고, 외국 독자들에게 중국을 소개하는 <생활의 예술> ,생활의 발견>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그 다음해에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 출간되었다. 이후에도 대외에 중국을 알리는 작업을 계속하여 중국 고전을 영어로 번역했다. 1948년 유네스코 예술부장, 1954년 싱가포르 난양대학 총장을 지냈다. 1965년 이후 타이완에 정착했다. 1976년 82세의 나이로 홍콩에서 생을 마쳤다.
『중국은 실천을 중시하고 서양은 추리를 중시한다. 중국은 정을 중시하고 서양인은 논리를 중시한다. 중국철학은 천명을 따라 마음의 평안을 얻는 임명안심(立命安心)을 중시하며, 서양인은 객관적인 이해와 해부를 중시한다. 서양은 분석을 중요하게 여기며 중국은 직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서양인은 지식추구에 중점을 두고 객관적 진리를 추구한다. 중국인은 도의 추구를 중시하여 행동의 도를 추구한다.』(<동서 사상의 차이> 중에서)
『중화 민족을 서양 국가와 비교해보면 진취성이 모자라고 보수적이며, 용감하고 의연한 정신이 모자란다. 반면 인내심이 매우 깊다. (…) 중국 문화는 정적인 문화고, 서양 문화는 동적인 문화다. 중국은 음(陰) 위주이고 서양은 양(陽) 위주다. 중국은 정(靜) 위주고 서양은 동(動) 위주다.』 (<중외의 국민성> 중에서)
린위탕은 중국과 서양을 비교하면서 알기 쉽게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