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게 뭐라고…
대학 때 교양 수업 시간에 ‘죽음’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교수님은 “만약 일주일 후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일주일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여러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닥쳐봐야 알겠지만, 그냥 살던 대로 살다 죽을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교수님은 “종교적 신념이 강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라며 신기해했다. 그럴 리가. 죽음에 관해 단 한 순간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신기하리만치 죽음과 무관한 삶을 살았다. 몇 년 전, 외할머니와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었고(두 분의 죽음도 ‘직접’ 경험 못하고, 장례 일정에 참여했을 뿐이다), 아빠가 8시간이 넘는 암 수술을 받을 때도 아빠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 번쯤은 상상해본다는 자살 혹은 내 죽음조차 떠올려본 적이 없다. 그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먼 이야기를 통해 흐릿하게 상상할 뿐이었다.
몇 년 전, 외할머니와 친할아버지가 몇 개월 차를 두고 돌아가셨다. 엄마 잃은 엄마를, 아빠 잃은 아빠를 위로할 길을 찾지 못해 당황했다. ‘나도 언젠가는 엄마를 잃고, 아빠를 잃을 텐데 그땐 어쩌지’ 생각하니 겁이 났다. 삶과 죽음은 다른 차원의 일이라 여겼는데, 삶 곁에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나의 무지를 한탄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생각보다 가깝다
언제부터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삶 곁의 죽음을 진지하게 직면하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죽음을 감히 상상도 못 하며 산 이유는 물론 한 번도 죽어본 경험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실패로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통을 견디지 못했고, 병을 이기지 못했고, 사고를 당했고, 수명을 다했고…. 죽는 이유는 언제나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죽음에 관한 감각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인생을 반쪽만 이해하며 살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때 마침 ‘죽음에 관한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여러 권의 책을 읽었지만, 첫 책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나의 선물》이라는 책이었다. 세 번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암 선고를 받고 1년 정도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난 한나의 이야기를, 그의 엄마가 담담하게 풀어냈다. 천진하고 투명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한나와 그의 가족 이야기를 읽으며 여러 번 울컥했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한나가 숨을 거두는 순간을 묘사한 문장이었다. “한나는 한순간 살아 숨 쉬더니 다음 순간 숨을 멈췄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토록 가깝다니. 지금까지 듣거나 읽거나 상상했던, 죽음에 관
한 모든 언어를 압도하는 문장이었다. 책모임을 통해 한나가 내게 준 선물이 있다면, ‘죽음만큼 삶이 소중하다’는 지극히 익숙하고, 평범한 진리였다. 한나의 엄마이자, 이 책의 저자인 머라이어 하우스덴은 한나의 짧은 인생을 이렇게 회고했다.삶을 평가하는 진정한 기준은 얼마나 오래 살았나가 아니라 얼마나 충만하게 살았나 하는 것이다. 내 딸 한나가 세 번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그동안 나 자신과 내 삶에 대해 믿어왔던 모든 것들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너무나도 섬뜩하고 무지비한 진실 앞에서 나는 새로운 답을 찾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아닌 한나 자신이 내 스승이 되었다. 한나는 정직하고 명랑하고 두려움 없이 살다가 또한 그렇게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나에게 더 깊은 지혜를 일깨워주었으며, 두려움은 줄이고 기쁨은 배가시키는 삶의 길로 나를 이끌어주었다.(12쪽)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
JTBC 〈판타스틱〉은 삶 곁의 죽음, 죽음 곁의 삶에 관해 다룬다. 장르 드라마의 일인자로서 ‘갓소혜’라 불리던 드라마 작가 이소혜(김현주)는 어느 날 유방암 4기 진단을 받는다. 스타 작가에서 이미 손댈 수 없이 전이되어 수술이나 치료도 불가능한 시한부 말기 암 환자가 된 것이다. 자존심과 독립심이 강한 이소혜는 빠르게 시한부라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지금 시작한 작품을 마무리하고,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우유니 사막에서 생을 마감할 계획을 세우지만 그런 그녀 앞에 ‘우주 대스타’이자 옛사랑인 배우 류해성(주상욱)이 나타난다. 그녀에게 암 선고를 내린 의사 홍준기(김태훈)는 이소혜의 주치의이자 ‘암 선배’다. 항암제가 듣지 않는 특이한 체질이라 치료를 받을 수조차 없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 그는 이소혜를 짝사랑한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시작된 사랑 이야기라니! 장르를 어떻게 구분 지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드라마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을(사람을) 맞이하고, 충만하게 살다가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런 그/그녀를 외롭지 않게 지키는 친구들에 관한 사려 깊은 이야기다.
이소혜와 홍준기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면, 그녀의 친구 백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게 한다. 백설은 겉으로는 부잣집에서 자라 정치 명문가의 며느리가 되었지만 실제로 노예와 다를 바 없는 학대를 당하며 산다. 친정은 파산했고, 오랫동안 투병하는 엄마의 병원비 때문에 ‘몸으로 때워야지’ 체념하며 견디지만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라”는 충고에 용기를 얻어 그 위선의 세계를 박차고 나온다. 죽은 듯 살았던 그녀가 ‘나답게 살 수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지만…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지만, 사실 시한부 인생이다. 심지어 10분 후 죽을 수도, 내일 못 깨어날 수도 있다. 되도록 빨리 죽고 싶어도 뜻대로 되지 않을 확률도 높다. 그렇게 몇 시간, 몇 년을 사는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과정은 중요하다. ‘얼마나 오래 살았나’보다 ‘얼마나 충만하게 살았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삶에 관해 고민할 때 역설적으로, 죽음을 상상의 영역에서 현실의 문제로 내 옆에 끌어다 놓은 것이 도움이 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곧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고민으로 이어지게 될 테니까.
“잘 사는 것만큼, 잘 죽는 것도 중요해요”라는 홍준기의 대사를 뒤집는다면 잘 죽는 것만큼, 잘 사는 것도 중요하다. 이소혜는 치료제 부작용으로 미각을 잃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성껏 요리를 하고, 그 엉망인 요리를 류해성은 맛있게 먹는다. 홍준기는 마지막 순간까지 후회 없이 살고 싶다며 봉사활동을 다닌다. 이소혜 곁에는 선망증상(기억상실증) 때문에 뜬금없는 행동을 하는 그녀를 ‘착한 거짓말’로 보듬는 우정의 공동체가 있다. 백설은 ‘자신을 아끼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렇듯 죽음을 다루는 드라마가 신파로 흐르지 않는 것은 죽음 곁에 오늘이라는 삶을 두었기 때문 아닐까? 그 삶을 공유할 공동체로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다시 “만약 일주일 후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일주일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 질문을 받으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까? 아마 같은 대답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분명 달라야 할 거다. 오늘을 충만하게 사는 것이 죽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잘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가 가기 전에는 ‘유서’를 써야겠다.
오수경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지만 글쓰기 울렁증이 있고, 책을 많이 사지만 읽지는 않고, 사람을 많이 만나지만 부끄럼이 많고, 내성적이지만 수다스럽고, 나이 먹다 체한 30대, 비혼, 여성이다. 선교단체와 학원복음화협의회 간사를 하며 '평생 청년'으로 철없이 살기로 결심했고 현재는 사훈이 ‘노는게 젤 좋아’인 청어람에서 열심히 일하는 척하며 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공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