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심정] 논실마을의 행복 비결
경쟁 떠나 행복을 좇아서
귀농·귀촌자들이 늘어갑니다
시골 간다고 다 행복해질까요
물질적 궁핍에서 자유롭고
이웃·자연과 사이좋게 지내며
삶과 노동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지혜와 힘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 원천은 바로 고전입니다
요즘 귀농·귀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산업화의 거센 물결이 한창 불어닥칠 때 이농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현상이었다면, 그 후 반세기가 지나 나타나는 귀농·귀촌은 산업화 이후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반세기 전의 이농도 지금의 귀농·귀촌도 행복을 위한 것임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같이 행복을 좇아 도시로 갔지만 불행한 사람이 적지 않았듯이 또 행복을 좇아 농촌으로 간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귀농하는 분들에게 농업이 생계의 방편으로서만이 아니라 행복의 길이 될 때, 드디어 농업도 참된 기반을 갖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귀농·귀촌하는 삶이 행복해야 합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삶을 권하고 싶습니다. 내가 사는 전북 장수의 이웃동네 이름이 논곡(論谷)입니다. ‘논실’이라고도 불리지요. 주변에선 제일 큰 동네인데, 한창때에는 100호가 넘었다고 합니다. 마을 앞엔 주경야독하던 마을 연혁이 자랑스럽게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주경야독을 연상케 하는 이 이름의 마을이 나라 곳곳에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귀농·귀촌이 단지 사람들이 농촌으로 돌아오는 현상적 흐름을 넘어서, 과거 주경야독하던 전통이 한 단계 더 높게 승화되어 돌아오는 문화적 현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물신, 즉 ‘돈’에 의해 지배되고, 이기(利己)와 경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우리나라는 특히 그 산업화 과정이 대단히 빠르게 압축적으로 진행되다 보니 천민자본주의의 폐습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 물질적 궁핍으로부터 자유롭고, 이웃과 자연과 사이좋으며, 삶과 노동 그 자체가 즐거운 상태로 되는 것이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과거 위대한 사상가들의 깨달음이 이제 보통 사람들의 일상의 삶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지혜와 힘의 원천을 고전을 함께 읽는 데서 찾아보실 것을 권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남곡 선생(가운데)이 이사장으로 있는 논실마을학교 독서회 모습. 이들은 장수와 남원 일대 가정집과 학교, 종교시설에서 모여 공부를 하고 있다. 논실마을학교 제공
행복한 귀농·귀촌을 위해 필요한 몇 가지를 간략하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째가 사이좋은 이웃입니다. 요즘 ‘소통’이 화두입니다. 특히 트위터와 페이스북, 카카오톡 등으로 인해 소통을 위한 수단은 많아졌지만, 정작 가까운 사람끼리의 소통을 보면 진정한 소통이 되고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농촌에서 아무리 주변 경관이 뛰어나고 맑은 물, 좋은 공기가 있다 해도 이웃과 사이가 나빠지면 결코 유쾌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웃과 사이가 좋아질까요? 자신과 생각이나 이해(利害)가 다를 때 무조건 양보하고 참아야 할까요?
참고 양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참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참는 것은 일종의 독입니다. 이 독이 저절로 약으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의 진화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지는 바탕에는 ‘내 생각이 틀림없다. 당연하다’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사실이 그럴까요? 나는 여기, 즉 ‘사실은 어떤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전을 함께 읽으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과학이 발전해서 훨씬 고전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공자의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吾有知乎哉? 無知也)라는 무지(無知)의 선언이나 “모르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참된 앎의 시작”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을 화두로 서구 사회에 한국 불교를 널리 알린 숭산 선사 등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현대과학으로 인식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이 말들은 훨씬 잘 다가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각자의 서로 다른 감각기관과 서로 다른 저장된 정보가 만나서 판단하는 것일 뿐, 사실이나 실제와는 다른(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일상적으로 자각하는 것이지요.
물론 머리로 자각한다고 해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잘 받아들여지고, 사이가 나빠지지 않는다고 금방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내 생각이 틀림없어” 하고 훈습된 상태가 빨리 변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늘 의식하고, 특히 다른 생각을 만나 힘들 때 이 자각을 연습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가랑비에 옷 젖듯’ 변해갈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내가 넓어져’ 이웃과 사이좋아지는 길이 아닐까요?
둘째는 경쟁을 넘어서, 자기실현의 즐거운 노동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는 같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늘 부족한 재화를 놓고 다투다 보니 ‘경쟁’이 지배적인 인간 행위의 바탕처럼 되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는 재화가 풍부해졌는데도 이 경쟁의식은 변하지 않고,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욕구와 결합하여 ‘무한경쟁’을 찬미하는 지경에 왔습니다.
그런데 ‘경쟁’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각하고 삶 자체를 바꾸는 결단을 내리는 과정으로 귀농·귀촌을 선택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요즘의 협동조합이나 마을운동들이 큰 흐름으로 나타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쟁 대신에 자기실현의 즐거운 노동에 의한 적절한 생산력은 우리들의 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협동하자!’고 해서 경쟁이 넘어서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협동할 수 있는 사람, 즉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먼저 되어야 비로소 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협동이 즐거워야 생산력도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선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다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때로는 자신의 상태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공자는 이것을 ‘서’(恕)라고 합니다.
그래야 자기 일에 자발적으로 즐겁게 전념할 수 있게 됩니다. 공자는 이것을 ‘충’(忠)이라 부르고, 중세 독일의 영성가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거룩함’이라고 부릅니다. 무엇이라 부르건 이 ‘서’와 ‘충’이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물질이 아니라 정신에서 풍요를 느낄 수 있는 마음 자세입니다.
요즘 ‘단순 소박한 삶’이 하나의 화두처럼 떠오릅니다. 공생공빈(共生共貧, 같이 살고 함께 가난하기)이나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도 이런 취지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너무 극단적이 되거나 진정한 자발성에서 나오지 않게 되면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
예전부터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즐기는 것이지요.
오늘날 이 ‘도’란 무엇일까요? 나는 그것이 정신적, 예술적, 영적 욕구와 같은 ‘진정한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욕구를 실현해 참맛을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물질에 대한 욕구보다 그런 욕구에 의해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욕구의 질이 변해서 이루어지는 ‘단순 소박한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발적 풍요’인 셈이지요. 농촌은 이런 풍요를 연습하기에 아주 좋은 곳입니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유쾌한 인간, 즉 현대의 군자들이 사는 마을을 꿈꿉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귀농·귀촌이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이남곡(인문운동가) namgok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