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권 원불교 무아봉공회 사무총장
» 노숙인들에게 급식할 식사 준비를 위해 식재료를 챙기는 강명권 교무
내것, 내 가족, 내 편, 내 종교
아전인수 벗어나 세상 위해 봉사
서울역 노숙인 수요일마다 저녁밥
"먹는 것으로 자존심 건드리지 마라"
북한동포 말에 종교의식 일절 안해
근처 기초수급자, 장애인 고시원도
작은 인연은 끊겼지만 큰 인연 맺어
국내는 물론 지구촌 어디라도 달려가
밖에서 자기를 밥 먹듯
빵점 남편 빵점 아빠지만
아내도 아이도 지지하는 지원자
28일은 원불교 대각개교절이다. 이날은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1891~1943)의 대각(큰 깨달음)을 기념하는 원불교 최대 축일이다. 주요 종교들이 교조의 탄생일을 최대 축일로 여기는 것과 달리, 원불교는 탄생보다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전환된 날’을 가장 중시하는 셈이다.
원불교의 깨달음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게 무아봉공(無我奉公)이다. ‘사사로움에서 벗어나 공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이다. 즉 내 것이나 내 가족, 내 편, 내 종교, 내 민족의 아전인수에서 벗어나 세상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이다.
» 서울역 지하철 14번출구 앞에 있는 무아봉공회 사무실엔 노숙인 급식을 준비하는 대형 부엌이 있다
» 무아봉공회 사무실에 쌓여있는 구호품들
처음엔 감사의 말보다 욕이 먼저
각 종교단체들이 참여하는 서울시 자활센터인 서울역따스한채움터에서 원불교 무아봉공회는 수요일 저녁마다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원불교 밥은 그 정성스러움으로도 정평이 나 있지만, 이웃 종교들과 달리 밥을 주기 전에 종교의식을 일절 하지 않는 점이 독특하다. 무아봉공회 사무총장 강명권(55) 교무는 “북한 동포로부터 ‘제발 먹을 것 주면서 자존심 좀 건드리지 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법회를 하지 않는 이유’를 밝혔다.
그런다고 노숙인들이 반색해주는 건 아니다. 무아봉공회가 2011년 노숙인 급식을 시작할 때만 해도 노숙인들은 밥을 늦게 준다거나, 밥이 질다거나, 반찬이 맛없다며 그릇을 집어던지고 욕설을 퍼붓기 일쑤였다. 남구로역 인근에서 아침을 급식할 때는 서울역 부근 무아봉공회 사무실에서 새벽 2시 반부터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어 5톤 밥차에 싣고 가면 감사의 말보다 욕이 돌아올 때도 많았다.
그래도 식사에 정성을 들이고 또 들였다. 그 한 끼가 노숙인들을 변화시켰다. 언제부턴가 욕설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욱더 많이 변화된 쪽은 봉사자들이었다. 강 교무는 밥을 얻어먹으러 온 탈북소년들에게도 친해지면 밥이나 국을 함께 퍼줄 것을 부탁하곤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남에게 밥을 퍼주면서 “세상엔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있구나”, “나도 남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구나”라며 자존감을 회복했다. 강 교무는 “예비 교무들이 이곳에 오면 처음엔 노숙인들이 무서워 말도 못 걸지만, 지내다 보면 이들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음부터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 데도 두려움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 네팔 지진 피해 현장에서 쌀을 나눠주고 있는 강명권 교무와 무아봉공회 회원들
» 진도 팽목항에서 봉사중인 무아봉공회 회원들
휠체어 보자마자 막무가내로 거절
무아봉공회가 밥만 퍼주는 건 아니다. 서울역 부근에 고시원도 운영한다. 47개의 방을 갖춘 고시원은 대부분 기초수급자나 장애인들이 들어와 있다. 이 고시원은 월 20만~24만원으로 저렴한데도 일반 고시원이 밥과 반찬 한 가지만 제공하는 것과 달리 1식3찬에 밥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도록 하고, 텔레비전과 인터넷도 자유롭게 접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러나 무아봉공회의 재정이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서울시가 그 고시원을 여성시설화하면 운영비를 지원해주겠다고 제안해왔다. 이에 따라 없는 돈 1억2천만원을 끌어들여 에어컨과 소방시설을 완비했다. 그런데 장애인 두 분이 갈 곳이 없었다. 강 교무가 몇달간 이 고시원 저 고시원을 전전하며 겨우 방을 얻어놓고 장애인을 모시고 가면, 고시원 주인은 휠체어를 보자마자 장애인은 들일 수 없다고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결국 다음 갈 곳은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내보낼 수도 있었지만 강 교무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서울시로부터 운영비를 지원받는 여성시설화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강 교무는 “갈 곳 없는 장애인들을 내보내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며 수줍게 미소지었다.
강 교무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출가했다. 어머니는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다가 떨어져 척추를 다쳤는데, 병원에서 복막염을 발견하지 못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병원 원장에 대한 원한이 컸는데 알고 보니 원장은 아버지의 친구였다. 아버지의 친구가 친구 부인을 일부러 죽게 둘 리는 없었을 텐데 왜 어머니는 그렇게 맥없이 돌아가시고 만 걸까. 의문에 찬 그가 만난 한 교무는 “진리를 공부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가를 결행했다. 그는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작은 인연은 끊겼지만, 큰 인연들을 맺었다”고 했다.
그의 책상에 놓인 3대 종법사 대산 종사(1914~98)의 법어가 큰 인연들을 말해준다. ‘무아무불아(無我無不我·내 없음에 내 아님이 없고), 무가무불가(無家無不家·내 집 없음에 천하가 내 집이네)’
가정 생계는 아내가, 그래도 부창부수
강 교무는 재해재난이 발생하면 무아봉공회 회원들과 만사를 제치고 달려간다. 인도네시아, 중국, 아이티, 일본, 필리핀, 네팔 등 천하를 내 집처럼 누볐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현장인 진도 팽목항에서도 8개월을 살고, 충남 태안 기름 유출 때는 115일을 살았다. 지금도 무아봉공회 사무실에서 밤을 날 때가 대부분이다. 경기도 산본에 있는 집엔 1주일에 한두번 가는 게 고작이다. 그가 받는 급료래야 100만원 남짓이다. 처자식을 경제적으로 돌보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그를 대신해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는 아내가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며 두 자녀까지 돌봤다. 그야말로 세속에서 보자면 빵점 남편, 빵점 아빠가 아닐 수 없다. 강 교무도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지 못해 가족들에겐 미안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가족의 평가는 세속의 잣대 같지만은 않다. 대학생 딸은 엄마처럼 교무와 결혼해 엄마처럼 살아가겠다고 한다. 이에 질세라 아들은 “아버지처럼 교무가 되어볼까”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아내도 부창부수다. 강 교무가 네팔 히말라야 지진 피해자들에게 30킬로그램씩 담긴 쌀 1500포를 나눠주고 와선 해발 3천미터가 넘는 산들을 초등학교 2·3학년 학생들이 사흘 걸려 지고 가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고 가슴 아파했을 때였다. 그의 아내는 “퇴직하면 그곳에 가서 아이들을 도우며 살아가자”고 부추겼다.
강 교무의 멘토는 소년원 출신 청소년들을 보듬고 살아가다 40대에 세상을 떠난 선배 길광호 교무였다. 그는 “그 형님이 ‘만일 내 이웃이 굶어 죽는다면 그것은 ‘법신불 사은님’(원불교의 신앙 대상)이 도와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내가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고, 내 이웃이 죄악에 시달린다면 법신불 사은님이 가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내가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는 “세상을 구원할 분이 대종사님만이 아니다”라며 “우리 모두 활불(살아있는 부처)이 되라는 게 선진님들의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오직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