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7월 부탄에서 트레킹 중인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은 부탄의 ‘행복 정책’을 도입할 것인가? 부탄과 문 대통령의 각별한 인연을 아는 사람들이 새 정부에 보내는 기대 섞인 질문이다.
지난해 7월, 당시 잠룡이던 문 대통령은 본격 대선 레이스를 앞두고 생각을 정리하는 여행을 떠났다. 문 대통령이 택한 여행지는 네팔과 부탄이었다. 그는 부탄에 2주일간 머무르며 체링 톱게 부탄 총리와 카르마 우라 부탄 국민행복위원장을 만났다. 문 대통령은 그들로부터 부탄의 행복정책을 소개받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귀국하면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정부가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면, 정부의 존재 가치가 없다.” 부탄 법전에 나오는 글이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지난해 10월, 탄딘 왕추크 부탄 보건부 장관이 ‘답방’ 형식으로 한국을 찾아 문 대통령을 만났다. 부산 롯데호텔에서 열린 두 사람의 대화에 배석한 ‘한-부탄 우호협회장’ 윌리엄 리씨는 “문 대통령께서 ‘민주당이 집권하면 부탄의 행복정책을 도입하겠다’고 그 자리에서 말했다”고 전했다.
한국과 부탄은 국교를 맺고 있지만 따로 대사관을 두진 않았다. 대신 ‘한-부탄 우호협회’가 두 나라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사업가와 예술인 등 1200여명이 회원인데, 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정치인 가운데 처음으로 이 협회에 가입했다.
특별한 인연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지난 9일 자정께 당선 확정 직후, 문 대통령과 처음 전화로 대화를 나눈 외국 수반은 체링 톱게 부탄 총리였다. 비공식적 대화이긴 했지만 전통 강국을 두고 소국 정상과 먼저 축하 인사를 나눈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 지난해 7월 부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부탄의 체링 톱게 총리. 사진 문재인 페이스북 갈무리
» 지난해 7월 부탄정부를 방문해 대담 중인 문재인 대통령. 사진 문재인 페이스북 갈무리
문 대통령이 부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부탄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부탄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있는 불교국가로 남한의 절반 면적에 75만여명이 사는 소국이다. 그러나 영국 신경제재단(NEF)이 2010년 ‘국민의 97%가 행복한 나라’(전 세계 행복지수 1위)라고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 바탕에는 2008년 국왕 직속으로 만들어진 부탄 ‘국민총행복위원회’가 있다. 부탄은 최빈국이었던 1972년부터 중진국 정도의 성장을 이룬 지금까지 국내총생산(GDP)이 아니라 국민총행복(GNH·Gross National Happiness)을 국정지표로 삼고 있다. 한 나라의 발전은 국민이 얼마나 행복한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부탄의 국정철학이다.
이에 맞춰 국민총행복 증진을 위한 5개년 계획을 주기적으로 수립하여 집행해왔다. ‘행복정책’의 기본은 △공평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루고 △이웃·동물·자연까지 행복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생태계를 보전하며 △진보적 사회에서도 지속가능하도록 전통적 가치와 제도를 진화시키고 △대중의 참여와 요구를 잘 수용하고 책임지는 효율적이고도 투명한 정부를 구성하는 등 4가지 축으로 이뤄져 있다.
이에 기초해 9개 영역 33개 지표를 마련해 국민행복지수를 측정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한다. 9개 영역은 생활수준, 심리적 웰빙, 건강, 시간 사용, 교육, 문화적 다양성, 좋은 정부, 공동체 활력, 생태학적 다양성과 회복력 등이다. 이런 요소들이 골고루 갖춰져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국민행복 조사에서 ‘행복하지 않은 상태’로 드러난 이들에게 초점을 두고 맞춤형 정책을 펼친다.
1907년 통일 왕국을 수립한 부탄은 원래 절대군주국이었지만, 4대왕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가 “한 사람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므로 국민들이 자신의 힘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다”며 군주제를 폐지하고 민주적 입헌군주제로 전환했다. ‘국민행복지수’를 도입한 것도 왕추크 왕이었다. 이후 행복지수는 세계적으로 번져가고 있다. 2006년 미국이 ‘국민행복지수’ 개념을 일부 받아들였고, 지난해에는 타이 정부가 ‘국민행복지수센터’를 설립했으며, 아랍에미리트도 이 정책을 도입해 두바이 정부에 행복부 장관을 두고 있다.
» 지난해 10월 부산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탄틴 왕추쿠 부탄 보건부 장관(왼쪽)과 윌리엄 리 한부탄우호협회 회장. 사진 윌리엄 리 제공
지난 2015년 부탄에서 2개월간 체류하며 행복정책을 연구하고 돌아와 <부탄 행복의 비밀>이란 책을 펴낸 박진도(65) 충남대 명예교수는 “이미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어 성장 정책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격차사회가 된 한국도 국민행복을 국가정책의 기본 이념으로 삼을 때가 왔다”며 “국민행복을 기획하고 일자리·국가교육·농어촌 등 각종위원회를 조정할 수 있는 국민총행복위원회를 설치해 국정 운영의 나침판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잠룡 시절부터 문 대통령이 부탄의 ‘행복정책’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새 정부가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행복위원회 설치 등에 대해) 아직 아는 바 없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선거 캠프에서 일했던 핵심 관계자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개인적 이익과 효율만 따지는 것을 넘어 사회적 가치, 즉 ‘행복’을 염두에 두자는 것은 경제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성장’이 아닌 ‘행복’이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자리잡는 일이 한국에서도 가능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