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사진 픽사베이.찾는 세간의 벗들에게 공양할 거리는 시원한 바람과 향기로운 차 한 잔입니다. 내가 깃들어 살고 있는 일지암 찻자리는 작은 연못 위의 누각입니다. 연못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한 평 남짓한 초당을 바라보며 녹아차를 마시노라면 내면의 온갖 시끄러움이 절로 잦아드는 무심과 적멸의 경지를 누립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지복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찻자리의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찻자리가 끝날 때까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기로 약조합니다. 나름 그럴 만한 이유를 짐작할 것입니다. 어떤 손님은 마루에 앉자마자 연못과 초당과 찻자리 풍경을 찍기에 바쁩니다. 차는 대충 목에 넘기고 페북과 카톡에 실시간으로 생중계를 하는 벗들도 있습니다.
초의 선사의 <동다송>에 대여섯 사람이 차를 마시면 그 차맛은 그저 수다스러움과 같다고 평한 것이 딱 이를 두고 하신 말씀 같습니다. 그래서 찻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묵언수행 모드로 전환한 것입니다. 요즘은 차를 마시기 전에 초의 선사의 시를 들려주어 분위기를 경건하게 마련합니다. “밝은 달은 촛불이요 또 벗이어라/ 흰 구름 자리 삼고 병풍으로 삼았네/ 솔바람 소리 들리는 듯/ 찻물 소리에 맑고 서늘한 기운 마음을 깨우네/ 흰 구름 밝은 달 두 벗만을 허락하노니/ 도인의 찻자리 이보다 좋으랴”
요즘 사람들은 너무 빨리 표현하고 너무 많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번잡하고 지친 벗들을 고요한 마음으로 안내하기 위해 명상 악기인 경쇠를 울려주는데, 청아한 소리가 울리면 단 5초도 참지 못하고 온갖 말을 들추며 이리저리 찬탄합니다. 가슴으로, 고요히, 오래, 깊이 느끼기보다 말로, 빨리, 많이 드러냅니다. 그저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와는 달리 이런 벗들도 있습니다. 단아한 얼굴을 가진 그 사람은 하늘 도화지에 느릿느릿 미묘하게 유영하는 구름을 그저 무심으로 유심히 오랫동안 바라봅니다. 미풍에 작은 몸을 맡기는 나뭇잎의 흔들림에 눈길을 주며 관세음보살의 미소를 짓습니다. 또는 지그시 눈을 감고 소맷자락에 스며드는 바람소리와 풀벌레 울음소리에 온몸이 젖어드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깊고 잔잔하고 고요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선일미(茶禪一味), 초의 선사가 추구했던 정신세계입니다. 차 마시는 일과 선은 한맛으로 통한다는 삼매의 다른 표현입니다. 삼매란 온전히 그것이 되는 일입니다. 차를 마실 때 온전히 내 모든 감각이 차맛에 젖어들면 깊고, 고요하고, 오래가는 여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잠시의 심심하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즉각 반응하는 것들에 눈길과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마트폰 삼매와 다선 삼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절실한 일상의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법인 스님(해남 일지암 암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