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심리치유공간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일인들입니다. 언어로 반영되는 문화의 차이가 늘 흥미로왔지만, 이제는 더욱 언어를 빌려 나타나는 몸과 마음의 세심한 움직임에 촉수를 세우게 되지요. 최근에 저를 찾아오는 한 한국인 내담자는, 한국에서 살 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라면서 세상의 부정한 것들은 눈감고 보지말라고 교육받아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주눅들어 살아왔었는데, 이제 눈 똑바로 뜨고 보는 것을 보는대로, 들은 것을 들은대로 말할 수 있는 세상이 한국에 온 것 같아서, 독일에 사는 자신에게 자존감을 일깨워준다며 감동의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외면하느라 돌같이 굳어버린 가슴이 서서히 풀리는 것 같다고요.
그런데 50여년을 다져온 억압의 땅은 그리 쉬이 풀리질 않지요. ‘마음을 보이면 당한다’는 생각은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훈련되어왔기 때문에, 한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직장에서는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에서 조차 그 사람은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괴롭다고 합니다. 게다가 직장에서‘묵묵히 잘 하고 있으면 알아주겠거니’라는‘한국식’ 기대는 먹히지도 않고, 자기가 한 일이라도 잘 한 것은 잘 했다고 스스로 내세워야 하는데, 그걸 못해서 오히려 바보 취급을 받는다고 속상해 합니다. 겸손이라는 미명하에 자기를 당당히 내세우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도 그사람과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지요. 독일에선‘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생각과 느낌을 말로 표현해야 합니다. 청소를 해놓고도, 케잌을 구워놓고도, 너를 위해서 내가 오늘 이렇게 저렇게 했어 라고 말을 하고, 또 상대방은 거기에 응당한 표현을 말로 해야 합니다. 내가 이런 저런 구상을 해서 이렇게 저렇게 성과를 올렸어, 알겠어? 라고 짚어주어야만 합니다. 그저 빙긋이 웃어주거나, 슬며시 고마움을 표시하려고 하는 동안 상대방은 이미 실망했거나, 다른 사람이 내 성과를 차지해버릴 수도 있게 되죠.
» 이승연 화백의 그림
언어는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남에게 전달하기 위해 생겨났겠지요. 혼자서 생각만 하고 언어로 표현하지 않으면 몰랐던 것이, 막상 말이나 글로 옮가려면 두리뭉실했었다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적당한 표현을 찾아 끙끙거리게 되고, 언어의 한계성도 느끼지만, 그러면서 생각이 다듬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힘든 것은 재주가 없어서라기보다, 마음이 명료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음’- 서양에는 없는 아주 멋있는 우리 말입니다. 영어의 mind나 독일어의 Geist는‘마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란 말이 있다는 것은 서양인들과 달리 정신적 활동인 생각과 감성을 떼어놓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마음’은 현대의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어눌한 말이라도, 또 외국어에 능숙하지 못해도 전달하고 싶은 것이 명료하면 소통은 가능합니다. 자기를 당당히 내세울 수 없는 것은 마음 속에 다른 무엇인가를 욕망하기 때문인 것 같고, 진정한 겸손이 아닌 자기비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그림이 마음 속에서 일그러져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결국은 말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자기자신이나 남에게 갖고 있는 뒤틀린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남은 나를 어찌할지언정 내 스스로에게는 거리낌이 없을 수 있지않을까요. 그게 자유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주눅들 필요가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