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에서 쓰레기를 주어 내려오는 한 등산객. 사진 박임근 기자
가을 산을 오릅니다. 찬 이슬이 내린다는 한로도 지나고 서리 내리는 상강이 내일 모레라지만 도봉산 계곡은 붉은 단풍들 사이로 군데군데 비치는 아직 푸른 잎들이 오히려 스산하고, 쉬임없이 지이-하고 울어대는 가을매미 소리 내 귀에 가득합니다.
“萬木迎秋氣 (만목영추기) 온 나무들 가을 기운 맞이하여
蟬聲亂夕陽 (선성난석양) 매미소리 석양에 어지러운데
沈吟感物性 (침음감물성) 생각에 잠겨 세상 이치에 감응하며
林下獨彷徨 (임하독방황) 숲속을 나 홀로 거니네”
영조 때 여성 성리학자 강정일당이 지은 <廳秋蟬(청추선)>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가을매미 소리를 듣다’라는 이 시의 알짬은 ‘沈吟感物性’이라는 대목입니다.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감응한다는 성리학적 사유로, 봄에 파랗게 돋아난 새 잎이 가을되니 누렇게 시들어 떨어지고, 여름내 울어대던 매미도 이제 저 울음 그치면 흙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 이치에 내 어찌 감응할 겐가.
만장봉을 향해 오르는 산길엔 늘 그렇듯 누군가 버린 사탕 껍질이며 음식 싸온 비닐봉지들이 굴러다닙니다. 나는 이걸 열심히 주우며 버린 자들 욕을 합니다.
같이 가던 친구가 보다 못해 내게 한마디 합니다. “욕을 할 거면 줍지를 말든지, 주울 거면 욕을 하지 말든지. 욕해서 쓰레기 주운 공을 도루묵으로 만드네.”뭐 딱히 공을 세우려고, 불가의 표현으로 착한 업을 지으려고 줍는 건 아니지만 친구 말이 옳지요.
쓰레기 버리는 사람들은 늘 있기 마련인 게 세상 이치입니다. 쓰레기를 보면 그냥 주우면 될 걸 가지고 그걸 버린 이를 욕하고 투덜대는 건, 사탕 껍질을 버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늘 있기 마련이라는 세상 이치에 감응하지 못하는, 세종 임금 말씀 마따나 ‘어린 백성’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 칭찬받으려고, 혹은 착한 업을 지으려고, 혹은 내가 착한 사람이라는 자긍심에서가 아니라 ‘그냥.’
그냥 길에 떨어진 사탕껍질을 줍는 것.
금강경에서는 이 경지를 이렇게 가르치더군요.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마땅히 어디에도 머문 데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우리 마음은 늘 그 대상이 되는 모양이나 소리, 개념을 좇아 그것에 매이는 게 상례여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면서 그 마음을 낸다는 게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의 이 말씀보다는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이 내게는 이해하기도 실천하기도 더 쉬워 보입니다.
“To action alone hast thou a right and never at all to its fruit; let not the fruits of action be thy motive; neither let there be in thee any attachment to inaction.”
너는 행위 그 자체를 할 권리가 있을 뿐 그 행위의 열매를 누릴 권리는 없다. 행위의 열매를 네 행위의 동기로 삼지 말아라. 나아가 네 안에 아무런 행위도 않으려는 집착을 가져서도 안 된다.
행위의 결과에 개의치 말고 그냥 행하라는 <바가바드 기타> 2장 47절의 이 말씀은 이 경전 전체의 핵심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디는 그 어느 분야보다도 결과를 중시하는 정치의 장에서 행위하면서도 늘 이 구절을 되새겼습니다.
착한 일 해서 천당 가려는 게 아니라, ‘그냥’착한 일을 하라는 이 가르침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알려 주셨지요.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7장10절)
만장봉 옆길을 돌아 산 아래로 내려오면서 내 바지 뒷주머니와 배낭 옆구리는 주운 빈 페트병이며 종이컵, 사탕 껍질로 제법 불룩해졌습니다. 이거 하나 주울 때 마다, 그 버린 자들을 욕해대거나 아니면 내가 이렇게 멋진 놈이야 으스대지 말지언저.
‘그냥’ 내가 할 일을 하였을 뿐인 겁니다.
이 글은 <공동선 11,1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