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살배기 외손자 녀석이 욕실에서 수도꼭지 틀어놓고 물장난에 신이 났습니다. “하부지 이리 들어와 보세요. 재미나요.”물에 젖은 타일 위로 미끄럼까지 타며 까불어대더니 결국은 꽈당, 바닥에 얼굴을 박고 넘어졌습니다. 왕하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녀석이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엉엉”
아마 평소 까불대다가 사고칠 때마다 제 어미에게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한 듯합니다. ‘그리하다가는 그리될 줄 아는 놈이 왜 그랬는고, 쯧쯧’
뭐, 하지만 저 어린 녀석만 그런 게 아니고 할아비인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이리하다가는 이리될 줄 알면서도 이리합니다.
검사, 시인, 배우, 선생, 신부, 인권단체 활동가, 목사, 정치인...한 달 남짓 계속된 “미투” 운동이 온 나라를 흔들고 있습니다. 한 명, 한 명 구체적으로 개인 이름이 불려 나오고 있지만 사실 남성 일반이 가해자라 해도 무방할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가해자로 지탄받던 배우가 제 손으로 삶을 마감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들의 삶을 간단히 요약하면, 먹고 번식하는 일, 이 두 가지입니다. 이걸 위해 평생 수고하고 고통을 견뎌냅니다. 다른 개체를 죽이고 착취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노라면 종교나 윤리, 도덕에 회의가 일어납니다. 사자는 새끼 누우의 목덜미를 물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놓아주질 않습니다. 원숭이 우두머리는 다른 수컷들이 자신의 암컷들 주위에 얼씬도 못하게 합니다.
먼 옛날 유대 땅 예언자 이사야도 이런 현실이 아주 괴로웠나 봅니다.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메시아 평화의 왕국을 이렇게 기다렸습니다.
사자며 새끼 양, 어린 아이로 대변되는 개체들이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 이런 일은 불가능하니 하나의 시적 비유일 터. 이 비유에서 평화의 왕국이란 본능이 지배하는 이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가능하면 다른 사람, 다른 개체들을 저 자신처럼 생각하고 배려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요즘 한창인 “미투”운동의 대의도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혹은 동성끼리도 서로 상대방을 수단으로 여기지 말고 목적으로 여기자는 데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운동의 방식도 그 본 뜻에 걸맞는 모습으로 진행되었으면 싶습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남자배우에게 쏟아진 여론의 비난과 심판 그리고 미움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공자님 말씀’은 역시 실천하기 어려운 공염불이지 싶기도 합니다. 피해자와 사회 그 누구로 부터도 용서받지 못하고 죽어간 그의 마지막 순간. 아마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을 겁니다. 최소한 용서라도 받고 죽었어야 할 것을...이토록 비참한 그의 영혼은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모세는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예수님은 성난 군중들에게 아무런 대꾸도 않으시고 그저 묵묵히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언가 글씨를 쓰십니다. 무얼 쓰셨을까요.
그리고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말씀하시고 또 무언가 쓰시기만 하니 “나이 많은 자들부터”자리를 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번 미투 운동을 통해 여성을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여겨온 그간의 우리 문화는 점차 바뀌어 갈 것입니다. 부디 이 운동이 가해자를 그저 비난과 미움으로 사회에서 매장시키는데 머물러서는 안되고, 가해자가 죄를 고백하여 용서받고,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타인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 저 이사야서의 평화의 왕국을 향해 한걸음 더 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워하지 않고 비판하는 일은 참 어렵기도 합니다.
이글은 <공동선> 발행인 김형태 변호사가 3,4월호 권두언으로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