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8년 참수 당하기 직전 해월 최시형의 모습
» 경북 포항 신광면 마북리 금등골 해월 최시형이 화전을 가꾸어 살던 옛터에 오른 천도교인들
‘이 땅에서 우리 겨레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온 세계 인류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려준 분이다. 우리 겨례로서는 가장 자주적으로 사는 길이 무엇이며, 또 그 자주적인 것은 일체와 평등한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가장 거룩한 모범이 바로 해월 선생이다.’
원주의 장일순(1928~1994)이 생전에 한 해월 최시형(1827~1898) 평이다. 원주지역 시민운동과 반독재투쟁의 멘토였던 장일순은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을 창립해 민주화운동을 문명전환의 생명운동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그는 천주교인이면서도 평생 해월을 흠모했다. 해월은 동학의 창도자 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넘겨받은 천도교 2대 교조이면서 동학혁명의 최고 지도자였고, 생명운동의 뿌리였다. ‘사람을 하늘처럼 섬겨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을 통해 현재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사람 중심의 세상’을 만들자면서 근세의 첫새벽을 깨운 이가 바로 해월이었다.
해월의 191번째 탄생일(21일)을 앞두고 지난 14~15일 그의 처절하고 치열한 발자취를 찾아나섰다. 먼저 해월이 태어난 경주시 황오동 229번지 ‘천도교 경주교구’. 이 교당은 해월의 제자이자 천도교 3대 교조인 의암 손병희가 1910년 해월의 탄생지 1천여평을 매입한 터의 일부다. 해월은 외가인 이곳에서 태어났다. 해월의 삶은 그야말로 고난으로 일관했다. 5살 때 어머니를, 1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천애 고아가 되어 천대 속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 경주문화원 김윤근 원장과 천도교경주교당 지킴이 이화자 할머니가 3.1운동 특별기도터인 폐가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경주교당의 모습이 부서지고 찢긴 해월과 천도교의 풍상을 말해주는 듯하다. 천도교의 전신 동학은 봉건 계급사회와 외세에 정면으로 맞섰기에 왕조와 외세로부터 동시에 핍박을 받았고, 일제식민지 때인 3·1운동을 주도해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 교세가 약화됐다. 일제의 탄압 때문에 각 교당의 소유권도 압수를 피해 개인등기화해 많은 땅과 건물이 사라져버렸다. 이 곳도 세필지 중 두필지가 일제 때 팔려버려 정작 해월의 탄생터는 교당 뒤뜰 담 너머 경주시공용주차장 부지에 있다.
교당 옆엔 폐가가 된 한옥이 방치돼 있다. 애초 동학수련원으로 세워진 이 한옥도 외지인들 소유로 넘어간지 오래다. 이곳은 3·1운동을 준비한 기념비적인 장소다. 3.1운동 당시 민족지도자였던 의암은 거사를 앞두고 전국에 9개의 특별기도소를 설치해 1919년 1월8일부터 2월25일까지 49일간 특별기도를 하도록 했는데 이곳이 영남지역기도소였다. 이 사실은 경주교당 지킴이 이화자(89)씨가 살림을 정리하던중 1910년부터 작성된 ‘경주교구연혁’ 책자를 발견함으로써 증명됐다. 골목길을 되돌아 들어간 한옥은 마당에 풀이 무성하고, 기존에 살던 이들이 버리고간 살림들이 부식돼 쓰러지기 직전이다.
경주문화원 김윤근 원장은 “민주정신의 태두인 해월의 탄생지이자 3·1운동의 발상지가 이렇게 폐허로 방치되어간다는 것은 기 막힌 일”이라면서 “정부와 경주시가 이 한옥을 매입해 동학과 3·1운동을 알리는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공용주차장 부지 등을 공원화해서 해월의 사람존중·생명존중의 정신을 일깨우는 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주는 동학의 명실상부한 본가다.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엔 수운 최제우의 탄생지와 그가 득도한 용담정이 있다. 김종운 수도원장 부부가 지키고 있는 용담수도원에서 하룻밤을 지내보니, 늦은방과 새벽에도 ‘내 몸에 하늘(한울)을 모셨다’는 ‘시천주(侍天主) 주문’ 소리가 끊이지않는다.
인근 방정환한울어린이집은 동학정신의 실현지다. 의암의 사위인 소파 방정환(1899~1931)의 이름을 따 천도교한울연대가 만든 곳이다. 동학의 인간존중 사상과 자신의 숲생태 철학을 결합해 숲유치원운동을 펼치고 있는 임재택 부산대 명예교수의 도움을 받아 설립된 곳답게 32명의 아이들이 생명력이 넘쳐보인다. 이 아이들은 이곳보다 생태텃밭과 도랑, 숲이 있는 인근 야외어린이집에서 지낼 때가 많다. 정미라 대표(61)는 “보통의 어린이집은 어린이들 안전 위주로 무엇이든 ‘하지말라’고 주의를 주지만 이곳에선 텃밭에서도 숲에서도 아이가 무엇이든 해보며 자연의 생명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포항시 신광면 마북리 검악산이다. 해월이 33세 때부터 살던 깊은 산골이다. 해월이 수운의 가르침을 받아 수도를 한 곳도 이곳이다. 해월은 37세때 수운으로부터 도통을 전수받고 1년뒤 수운이 대구감형에서 참수를 당하자 동학을 이끌며 민초들을 깨운 해월은 1998년 참수 당할때까지 보따리 하나 끼고 36년간 관군에 쫓겨다녀 ‘최보따리’로 불렸다.
박남문 전천도교청년회장(52)의 안내로 오르는 산길은 처음부터 난관이다. 포항시가 해월 유적지로 지정하고 곳곳에 푯말까지 세웠지만, 마북리 주민들이 상수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자체적으로 저수지 옆길에 철조망을 쳐놓고 문엔 열쇠를 채워 등산로를 폐쇄해 순례마저 막아버렸다. 철조망을 간신히 넘었다. 아직 풀이 자라기전인데도 계곡을 덮은 마른풀로 길과 계곡이 구분이 안돼 신발이 흠뻑 젖은 가운데 10여리 산길을 올랐다. 1시간30분쯤 오르자 포항시에 설치한 푯말이 서있다. 그런데 글이 적힌 간판마저 떨어져있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지금까지도 ‘해월’에겐 아직도 봄이 오지않은 것만 같아 하산길이 더욱 쓸쓸하다.
검등골을 내려와 신광온천 앞에 오니 해월어록비가 서있다. 그토록 평생 쫓기고 칼끝에 죽어가면서도 화평의 기운을 끝내 잊지말도록 독려한 그의 온화한 음성이 담긴 기록이다.
“사람을 대할 때 항상 꽃이 피는 듯이 얼굴을 가지면 가히 사람을 융화하고 덕을 이루는 데 들어가리라. 누가 나에게 어른이 아니며 누가 나에게 스승이 아니리오. 나는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만한 것은 스승으로 모시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