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송전탑 반대운동 펼침막 사진 강재훈 기자
기독교 탈핵 연대의 이름으로 희망버스를 타고 밀양에 갔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값싼 은총과 용서를 남발하는 한국 교회를 부끄럽게 했다면 오늘의 송전탑은 약자와 함께하는 생명의 하느님 앞에 기독교인을 불러 세운 곳이다. 2012년 74살 이치우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불붙기 시작한 밀양 송전탑 사태는 발전과 개발의 명분하에 박정희 정권 시절 만들어진 전원개발 촉진법이 그 근거다.
사실 밀양사태는 산과 들, 논과 밭을 가로질러 세워진 송전탑이 수많은 이 땅의 약자들의 눈물 위에 세워진 것임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누군가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고 했다. 그렇기에 송전탑 건설의 중단은 우리 욕망의 멈춰짐과 맥을 같이한다. 밖을 향한 투쟁만큼 우리 안의 욕망에 대한 저항도 함께 불러낸다.
1978년부터 지금까지 225회나 오작동되었으며 온갖 비리로 얽힌 고리발전소와 밀양의 송전탑은 본래부터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져 있었다. 며칠 전 <코리아 타임스>는 그린피스 보고서에 근거해 고리원전에서 후쿠시마원전 같은 사고가 터질 경우 그곳보다 훨씬 취약한 구조를 지닌 한국의 치명적 폐해를 경고했다. 고리를 기점으로 반경 30㎞ 이내에 거주하는 350만명이 방사능에 전폭 오염될 것이고 이들 중 오직 5% 안팎 사람에게만 약물치료가 가능한 것이 현 실정이고 수준이란다. 인터넷엔 체르노빌 10배에 달하는 후쿠시마 사건 이후 영토의 상당수가 방사능에 오염된 일본의 실상이 전해진다. 무리하게 집단자위권을 행사하려는 야욕과 우경화도 이런 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국전력이 중단된 지 8개월 만에 송전탑 공사를 다시 시작한 20일 오전 경남 밀양 부북면 대항리
평밭마을 주민들이 공사차량이 들어오면 목을 매겠다며 만든 올가미가 마을 진입로에 걸려 있다. 밀양/김정효 기자
성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인간에게 맡기되 오직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한 그루만은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 일찍이 <순수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란 책을 썼던 칸트 역시도 성서 첫머리에 ‘~하지 말라’는 절대 한계에 대한 신적 명령에 주목했다. 지금껏 인류는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능사로 알았다. 하지만 성서는 자연의 한계 안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축복이라고 가르친다.
자연의 한계 안에서 자신을 적응시키며 살았던 뭇생명에 반해 오직 인간만이 한계를 벗고자 했고 스스로 별종이 되었다. 기독교인들 중에 핵 마피아가 상당수란 것은 기독인들이 너무도 특별한 존재가 되었음을 방증한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핵 마피아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성서는 절대적 한계 안에서의 삶을 가르쳐 지키게 할 것을 지금도 요구한다. 매 주일 예배 시 고백하는 사도신경 첫 조항이 바로 그것이다.
바벨탑을 쌓고 멸망한 인류를 대신해 노아가 하느님의 새 파트너가 되었을 때 신은 역시 한계 안에서 살 것을 명시했다. 사람들 눈에서 억울한 눈물을 흘리지 말 것과 동물을 피 채로 먹지 말라는 것이 바로 절대적 한계의 실상이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신념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좋은 세상을 위해 한계 안의 삶을 택하는 존재인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밀양의 어르신들은 이제 송전탑이 다른 마을로 옮겨진다 해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송전탑은 세상을 달리 보게 만든 사건이 되었고 에너지 중독에 빠진 우리들에게도 새로운 세계관을 깨우쳐주었다. 이제 밀양은 경상도의 작은 지명이 아니라 대대적 가치충돌을 통해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지을 거룩한 땅임을 확인해주는 땅이다.
이정배 감신대 교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