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신과 함께1>의 한 장면
군대에서 군종장교(군목)로 일했다. 휴전선을 지키는 부대 소속이었다. 밤새 경계근무를 하고, 새벽녘에 철수해서 쉬었다가 해질녘 다시 투입되는 걸 반복해야했다. 실탄을 장착하고 있어 사고 위험이 크고 늘 긴장하지않을 수 없었다. 산 속에서 소대 별로 생활하다 보니 심리적인 고립감도 컸다.
내가 소속된 연대본부는 고개 넘어 후방에 있지만, 철책 경계 맡은 대대에 자주 갔다. 밤에는 철책을 지키는 병사들을 위문하고, 낮에는 인성교육과 상담을 했다. 처음에는 간부나 선임 병들이 내가 방문하는 걸 경계하고 불편해 했다. 후임 병들도 “잘 지냅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라며 학습된 말만 반복했다. 자기 부대 문제가 상급부대로 알려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내가 방문하기 전, 사전 교육으로 입단속 시켰던 거다.
나중에 듣기로 내 전임자는 철책방문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자주 가는 게 더 낯설고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거다. 자꾸 보면 정이 든다고 나중에는 간부들도 경계심을 풀고 편하게 대해 주었다. 나도 간부들이 난처해지지 않게 주의했다. 신병들이 자대 배치 받지 전, 며칠 동안 연대본부에 대기하는 데, 이때 신병들을 집중적으로 만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신병이 선임 병이 되고, 마음을 여는 병사들도 많아졌다. 병사들이 나와 상담하는 걸 경계하지 않고 서로 도움을 주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철책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는데, 낯익은 병사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기색으로 나를 자꾸 쳐다봤다. 근데 눈을 맞추려고 하면, 눈을 피했다. 뭔가를 의식해 머뭇거리는 거였다. 이제는 부대 분위기가 상담하는 걸 경계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했다. 그것도 병장이었다.
표 나지 않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나에게 할 얘기 있는 것 같은데?”라고 말을 걸었다. 예감이 적중했다. 여자 친구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 억울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며칠 동안 잠도 못 잤다고 한다. 그 날 밤 탈영해 직접 얘기를 들으려고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철책에서 내려왔다는 거다. 군대에서 간혹 겪는 일이다. 그래도 위험한 상황 직전에 불안한 마음을 털어 놓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 모든 게 잘 마무리 되었다.
나중에 물어 보았다. 그 때, 그렇게 중요하고 위험한 순간에, 도움을 요청할 마음이 있으면서, 왜 머뭇거렸냐고. 병장이기도 한데, 무슨 눈치를 본 거냐고. 의외의 대답을 했다. 후임 병들이 볼 까봐 머뭇거렸다는 거였다. 후임 병들에게 체면이 안 선다는 거였다. 그게 도대체 뭐 길래! 체면과 허위의식이 얼마나 무서운 가를 느꼈다. 그렇게 간절한 위기 상황에서도 별 것 아닌 허위의식이 작동한다는 게 놀라웠다.
나중에 간부들에게 이 얘기를 하니, 사실 자기들도 그럴 때가 많단다. 힘든 마음을 나누고 도움 받고 싶은데, 부하들이 있으면 괜히 체면 때문에 꺼리게 된다고. 그러고 보니 우리 삶 곳곳에는 체면과 허위의식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일을 그르치는 게 많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