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8월, 성모병원 21층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물론 수십여년을 문학계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명성을 알고 또 그분의 몇몇 작품들을 통하여 내 인생의 수없는 조각보를 이어 붙여 가면서 성장과 성숙을 해 왔던 나였기에 그 분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은 내게 큰 기쁨과 경이로움일 수밖에 없었지만 침샘암으로 마지막 삶의 여정을 고단하게 견뎌내고 있는 상황에서 선뜻 다가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저 복도를 지나다닐 때 가족 휴게실에 반쯤 누운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그 분의 뒷 모습을 살며시 바라볼 뿐이었다. 세상, 그가 이제 이별해야 할 세상, 그 곳에는 한강이 흐르고 이별과 만남이 교차되는 버스 터미널이 있고 이름 모를, 한 번도 인연을 맺지 않았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수없는 아파트가 있었다. 아주 친숙했던 세상이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낯설어지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 세상을 바라보는 그 분의 눈빛이 그렇게 말해주는 듯 했다.
복도를 지나다니면서 그런 그 분의 모습과 마주칠 때, 또 어쩌다 그 분의 눈빛과 마주칠 때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나는 가벼운 목례를 했고 그 때마다 그분은 눈가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답 인사를 해 주시고는 했다. 손녀들이 할아버지의 쾌유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든, 어설프지만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쪽지와 카드들이 촘촘하게 붙어 있는 병실 문을 열고 그 분께 다가갔을 때에도 말없이 그렇게 엷은 미소를 보여 주셨다. 삶의 마지막 여정을 ‘암’이라는 놈과 힘겹게 싸워 가는 그 시간들안에서 얼마나 갈등과 고통, 번민이 있었겠냐마는 마치 그분은 이미 하늘나라에 평화로이 안긴 그런 여유롭고 해탈한 모습이었다. 작품이 곧 삶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분의 삶이 작품안에 온전하게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십 여차례 그 분을 뵈옵는 동안 난 어느 날 그 분에게 조심스럽게 안수 기도와 축복을 청했다. 이미 그는 여러 작품을 통해 내게 인생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지만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삶의 마지막 여정을 가고 있는 그 모습 또한 내게 충분히 스승이며 교재였다. 하지만 그 분은 마치 ‘어떻게 평신도가 수도자에게 안수를 해 주냐’는 마음이셨는지 손사래를 치셨다. 나는 응석을 부리듯이 “선생님은 이미 저의 스승이고 어른이고 선배이십니다. 그러니 인생 후배에게 잘 살라고, 또 수도자의 길을 잘 걸어가라고 축복해 주세요”라며 그 분의 한 손을 내 머리위에 가져다 얹었다. 그러자 그분은 그냥 그렇게 기도를 해 주셨어도 괜찮은데도 온 힘을 다해 침대에서 일어나 걸터 앉으셨고 병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내 머리위로 두 손을 포개 얹으셨다. 그리고 오랜 시간 기도를 해 주셨다. 내 머리부터 발 끝까지 그 분의 존재감이 전기가 지나가듯이 휘돌아쳐 움직이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분의 인생의 일부가 내게로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환자로 죽지 않고 작가로 죽겠다’며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작가 ‘최인호’ 그 분은 그렇게 내게 큰 스승으로 자리매김했고 그래서인지 짧은 만남이었지만 몇 년이 지나고도 해마다 그 분이 돌아가신 9월이 되면 긴 여운과 그리움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