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3.1만세운동 재연체험행사가 열려 서대문구청 직원들과
시민들이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최의 특강에서 `교회와 민족'에 대해 강의하는 이만열 교수와 수강생들.
사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공
교회와 민족은 함께 갈 수 없는 것인가.
일부 목사들이 친일 사관에 동조하는 뉴라이트의 선봉에 서고, 남북의 화해보다는 갈등을 조장하는 데 앞장서면서 이런 물음이 커지고 있다. 일본 우파정권이 반성 없이 역사 왜곡과 군국주의로 치닫고, 지난 5년간 남북 간 신냉전을 맞으면서 더욱 그랬다.
이에 대해 이만열(75)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답하고 나섰다. 최근 8주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주최로 ‘교회와 민족’에 대해 특별강연을 한 그를 19일 서울 필운동 자택에서 만났다.
“기독교는 민족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기독교인은 특정한 민족과 국가에 속해 있다. 그래서 국가와 민족 속에서 기독교의 보편적 이념을 구현해간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개신교를 수용한 초기 크리스천들은 국내적으로는 유교적 신분제도와 부정부패에 저항하고, 외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면서 기독교적 평등을 구현하는 데 가장 앞장섰다고 주장한다.
“한국 교회사를 두고 원산부흥(1903년)-평양부흥(1907년)-100만인 구령 운동(1909년)만 기억하는데, 그렇지 않다.”
개신교가 내적인 부흥만 위해 올인한 게 아니라 이 민족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가장 앞장섰다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원로사학자이기도 하지만, 30여년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전신인 한국기독교사연구회를 설립한 한국 개신교 사학자답게 그는 구체적 사례를 제시한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기독교인 청년들이 시위를 하고, 이준 등 전국 기독교 청년 대표들이 복합상소를 올렸다. 1903년에 크리스천으로 개종한 김구도 상동교회에 올라와 을사늑약 철폐운동에 가담했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자결한 정재홍, 하얼빈에서 안중근과 함께 거사한 우덕순,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1909년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이재명, 광복군 의열단으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한 강우규, 서울 시내에서 수백명의 일경과 총격전을 벌인 김상옥, 만주에서 싸운 평강열 등이 다 크리스천 청년이었다. 1921년 청산리 전투에서 선봉에 선 대한신민단은 크리스천 청년들로 이뤄진 부대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개신교인 수는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했지만 경찰에 체포된 수의 17~22%가 개신교인이었다”며 이처럼 우리 민족을 위해 가장 헌신적으로 예언자적 사명을 다했던 한국 교회가 해방 이후부터 길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했다.
“해방 후 미군정이 일제 친일파들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한 가운데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이 이미 1943년 미국으로 돌아갔던 선교사들을 다시 불러들이면서 통역정치, 선교사정치가 펼쳐졌고, 이에 가담한 목사들이 친일파들과 함께 기득권화했다. 또 북에서 공산당에 토지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핍박당해 남하한 개신교인들이 반공의 최일선에 섰다. 서북청년단도 교회와 관련이 깊었다. 한국 교회가 김구·김규식 같은 중도파보다는 이승만 쪽에 쏠리면서 이승만의 당선을 위해 교회가 부정선거 모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서울 필운동 자택 서재에서 이만열 명예교수
그는 “해방 후엔 친일을 청산하고 분단 상황에선 분단을 넘어 민족 화해를 위해 예언자적 소명을 해야 할 교인들이 기득권의 단맛에 취하면서 권력의 안보논리에 편승해 북한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는 게 기독교 복음의 진수인 양 부르짖게 됐다”고 개탄했다. 그는 보수 기독교가 복음을 몰라서라기보다는 교회 대형화와 목사 세습 등에 대한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그런 극단적 논리에 편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보수파들이 현대사에서 산업화의 성과를 주로 강조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필리핀은 50년대까지 우리나라보다 앞섰고, 북한도 70년대까지 국민총생산에서 남한을 앞섰다. 그러나 필리핀은 마르코스 독재로, 북한도 1인독재로 인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말살돼 경제적 역동성도 죽어버렸다. 반면 남한은 이승만과 박정희 유신독재에도 4·19와 유신항거 등 끈질긴 민주화 운동을 해왔기에 산업화를 이루며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100년이 조금 넘은 한국 기독교가 벌써 조로 현상을 보이는 것을 가장 심각하게 여긴다. 이 땅에서 1000년 이상 지속한 불교와 500년 이상 지속한 유교가 퇴락할 때 보인 모습을 개신교가 벌써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교회가 이렇게 치닫는 동안에도 1960~70년대 민주화 인권운동과, 1980년대 통일운동에 가장 앞장선 크리스천들이 있었다”며 한국 교회가 기득권 지키기보다는 자기 것을 내어놓을 때 희망을 열 것으로 본다.
그는 개신교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인 고신 교단의 장로이지만 교인들로부터 ‘민족주의자’란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그가 희년선교회를 통해 타민족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온 것을 본다면 그의 가슴이 닿는 곳이 어디인지 알게 된다. 희년선교회는 외국인노동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매주 무료 의료봉사를 하며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우리가 일본 강점기에 이민족인 일제에 당한 설움을 똑같이 타민족에게 줘서는 안 된다며 이 교수가 설립해 20년째 이끌어온 단체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