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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임을 본다, 산은 산이 아님을 본다, 산은 다만 산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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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논어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임금께서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신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명(名)을 바로 세울 것이다.”
자로가 말씀드렸다. “현실과는 먼(迂) 말씀이 아니신지요. 어찌 명(名)을 먼저 세운다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로야, 너는 참 비속하구나.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입을 다무는 법이다. 명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불순해지고, 말이 불순해지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하게 집행되지 못하고, 형벌이 잘 집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따라서 군자가 명을 바로 세우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행해지게 될 것이니, 군자는 말을 세움에 있어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제13편 자로) 

 

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故 君子名之 必可言也 言之  

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이 구절이 요즘들어 나에게는 절실하게 다가온다.
공자의 정명에 대하여 자로가 현실과 먼(迂)이야기라고 비판한다. 공자가 날카롭게 나무란다.
나에게는 공자의 정명은 요새말로 하면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현실이 풀어야할 난제가 많을수록,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할수록, 모순이 중층적이고 복잡할수록 이 정명(正名)이 요구되는 것이다.
21세기는 인류가 엄청난 기로에 서는 시대임에 틀림 없다.
비록 우활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때일수록 인류의 존속과 행복을 위한 대장정의 ‘종합철학’을 올바르게 세우는 것처럼 중요한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실천하는 분들게 다소라도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소개한다.

 

이남곡마음편집.jpg        

*출처: 인터페이스리프트       

              
우리나라 현대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 성철 큰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생각한다. 원래 선승의 화두를 이치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수도 있고, 선문(禪門)의 금기(禁忌)일지 모르지만, 요즘 보고 있는 <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필부의 만용일수도 있지만, 이제는 선가(禪家)의 화두 속에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는 극히 소수의 깨달음의 세계에 머무를 수 없는 보편진리와 그에 바탕한 삶 그리고  사회적 실천이 시대의 요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먼저 박석 교수의 번역을 통한 이즈쓰 도시히코의 견해를 간단히 소개한다.

 

걸출한 선사들이 지금까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절Ⅰ→ 무분절→ 분절Ⅱ’의 전체 구조를 적확하고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길주吉州 청원유신靑原惟信의 ‘산은 산임을 본다→산은 산이 아님을 본다→산은 다만 산임을 본다’보다 탁월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청원유신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무본질적 분절을 분석하는 실마리로 한다.

 

“노승이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을 때,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친히 선지식을 만나서 하나의 깨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하나의 휴식처를 얻고보니 여전히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

원래 본질이란 존재의 한계 짓기, 즉 존재의 부분적·단편적· 국소적 한정을 의미한다. 이 부분적 존재 응고의 중심적 거점을 이루는 것이 본질이다. 이렇게 국소적으로 규정된 본질을 둘러싸고 하나의 사물이 조립된다. 그러한 사물의 전체가 분절Ⅰ의 세계다. 상식은 그것을 경험적 세계라 부르고, 대승불교에서는 망념의 세계, 허공 꽃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망념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은 분절 Ⅱ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 즉 진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절Ⅱ의 세계는 그 성립과정에서도 내적구조에서도 분절Ⅰ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분절 Ⅱ를 분절Ⅱ답게 만들고 분절Ⅰ로부터 확연히 나누는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이 무분절과 직결되고 있다, 혹은 직결된 것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존재의 궁극적 무분절태란 보통 선수행자가 무라든지 공이라든지 하는 이름으로 의미하는 의식·존재의 제로 포인트이고  나아가 그것이 동시에 의식과 존재의 두 방향으로 분기되어 전개하는 창조적 활동의 출발점이다. 이 의미에서의 무(無)에는 유(有), 즉 존재의 끝없는 창조적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존재 에너지가 온전히 그대로 무로부터 발산하여 사물을 드러나게 하는 그 모습을 분절 Ⅱ의 의식은 알아차린다. 즉 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에서는 이른바 현상계 경험적 세계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제각각 무분절자의 전체를 들어서 자기분절하는 것이다. 무의 전체가 그대로 산이 되고 물이 된다. 즉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다’
분절 Ⅱ의 존재차원에서는 모든 분절의 하나하나가 그 어느 것을 취해서 보아도 반드시 무분절자의 전체 현현이며 부분적 · 국소적 현현은 아니다.

 

이상 이즈쓰 도시히코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진한 글씨는 내가 임의로 한 것이다.
나는 상당히 탁견이라고 생각되었다.

분절Ⅰ의 의식으로부터 분절 Ⅱ의 의식으로 나아가는데는 이른바 ‘무분절에 대한 깨달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 깨달음이 예전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오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현대 즉 21세기의 인류사에서 보면 보통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무분절의 깨침은 이제 현대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계의 상식(?)으로 되고 있다. ‘일체(一體)’, ‘온생명’, ‘한생명’, ‘한살림’,‘유일한 생명단위로서의 우주’ 등 표현은 다양할지 몰라도 분리독립된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의 종이, 한 벌의 옷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선사(禪師)들의 깨달음이 결코 경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인식이나 논리적 접근으로는 표층의식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나, 심층 의식까지를 바꾸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들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깊이 다가오는 생각은 종교적인 접근이든 과학적인 접근이든 그것이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서 연습되고 실천되어야 진실하다는 것이다.

이남곡붓다이비에스2편집.jpg

*출처: EBS

 

무분절을 깨닫는 삶은 ‘자기중심성을 넘어 일체(一體)를 자각하는 삶과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확히 들어 맞는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8년간 참여했던 공동체는 ‘무아집, 무소유, 일체’를 이념으로 그것을 실제로 현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시스템과 의식의 괴리, 소공체가 빠지기 쉬운 폐쇄성, 실행 과정의 무리(無理) 등으로 보편화에는 한계를 노정했지만, 나는 상당히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인류가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기초는 도시히코의 표현대로 하면 분절Ⅱ의 의식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철학적 기초가 구체적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무소유공동체의 실험을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공동체 경험에는 그 운영원리가 있었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겠다.
그것은 ‘무소유(無所有) 공용(共用)의 일체(一體)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전문분업과는 그 바탕에서 다르다. 분절Ⅰ의 사고방식에 의한 분업은 사람을 작업과정의 일부분으로 고정하고 제약한다.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된다. 그러나 무소유일체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은 분절 Ⅱ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다.  6개월에 한 번 자동해임(自動解任; 註)을 시스템화한 것이 그 구체적 방식이다. 비록 전술(前述)한  이유들 때문에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언젠가 보다 보편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리라고 생각한다.
<註;누구나 6개월에 한번 자기가 하던 일에서 해임된다. 한 달 정도 하던 일을 풀어놓고, 자기가 어떤 심정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는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등을 깊이 생각하여 새로운 일을 맡는 시스템. 실제로는 전문성이나 효율성이 고려되어 같은 일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의식이 뒷받침되고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면 대단히 훌륭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어디 그 뿐일까?
분절 Ⅱ의 의식으로 살게 되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가 다 무분절 즉 일체(一體)의 현현(顯顯)체이기 때문에 생태적 삶은 너무 자연스럽게 되어 ‘산은 푸르고, 물은 맑게’ 된다.
또한 나와 너의 경계가 점차 사라져 ‘사랑과 평화’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
예술적 감각이 고도로 발달하게 되어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에서도,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이나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서도, 그 감각의 순도가 높아져 세상이 있는 그대로 최고의 예술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주자연계 안에서 자신이 지닌 특성을 가장 잘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남곡꽃물주는동자승조계사편집.jpg

*출처: 조계사 홈페이지

 

미래를 예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알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의 운명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인류의 한사람으로서 새로운 세상을 그려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암울한 전망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 숭고지향과 지적능력을 믿는 사람으로서 보다 밝은 전망을 갖기 위해서 그를 위한 여러 설계의 바탕이 될 종합철학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나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인류의 선각자들이 마음의 세계에서는 밝혀 놓은 진리들이 있다. 다만 이제는 그것이 ‘마음’이나 ‘종교’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 용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한 과정이 인류 역사였다는 자각과 이제 그 창조적 융합이 요청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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