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한 조각의 기억
밤새 비가 억수로 쏟아진 다음날 아침, 정원이 궁금해 문을 열고 뜰로 나갔습니다. 푸른 나무들에 둘러싸인 아침 정원은 청신한 공기를 듬뿍 머금고 있었지요. 간밤에 내린 비로 정원은 깨끗이 세탁되어 있었습니다.
오, 하늘은 만물을 정화하는 ‘신의 세탁기’로구나!
정원의 나무들도, 불어난 물이 콸콸콸 흘러내리는 집 옆의 개울도, 뒷산으로 오르는 한적한 오솔길도 밤새 신이 돌린 세탁기에 의해 말갛게 씻겨져 있었습니다. 고마우셔라! 때때로 신의 세탁기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만물의 더러움이 씻겨지고 지구별의 영혼들이 정화될 수 있겠습니까.
창조계는 하나님의 선(善)이 녹아서 된 것이라던가요. 정원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그 말이 실감으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지금도 창조를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분의 창조의 수고로 파릇파릇 시간의 새순은 돋아나고 만물이 새로워지는 것이지요.
<정원에서 하나님을 만나다>라는 책을 쓴 비겐 구로얀은 죄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도 ‘에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은 낙원을 떠나면서 낙원 한 조각을 가져갔다. 인간의 영혼 속에는 그가 가져갔던 낙원 한 조각이 메마른 이 세상에 대한 기억보다 훨씬 더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진정한 정원사의 살갗을 긁어 파보라. 그러면 그대는 아담이 지녔던 낙원에 대한 기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시인 월트 휘트먼은 ‘아담이 지녔던 낙원에 대한 기억’을 가슴 깊이 아로새기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정원사입니다. 작은 풀잎, 개미, 모래알 하나에서 우주를 보고, 지상의 만물 가운데 어느 하나 완전하지 않음이 없음을 노래하는 정원사. 존재하는 모든 것 앞에서 신비와 경이로움을 느끼는 정원사.
만물 속에 깃든 창조주의 숨결을 온전히 자기 속에 내면화한 정원사인 휘트먼 시의 전문입니다.
풀잎 하나가
별들의 운행에 못지않다고 나는 믿네.
개미 역시 똑같이 완전하고
모래알 하나, 굴뚝새의 알 하나도
그러하다고 나는 믿네.
청개구리는 최고의 걸작이며
땅에 뻗은 딸기 덩굴은
천국의 객실을 장식할 만하다네.
내 손의 작은 관절이라도
그것을 능가할 만한 기계는 세상에 없네.
고개를 숙인 채 풀을 뜯는 소는
어떤 조각품보다도 훌륭하다네.
그리고 한 마리 새앙쥐는
몇 억의 무신론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기적이라네.
-<나 자신의 노래>
인디언들 사이에서 회자되어온 우화 한 자락 들어볼까요.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진흙덩어리에게 물었답니다. “너는 뭐니?” 진흙덩어리가 대꾸했지요. “나는 진흙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장미 옆에 놓여 있어서, 장미 향기를 품고 있답니다.”
진흙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인간은 꽃과 나비, 바위, 구름, 태양, 달, 별들과 더불어 있기에 생명의 환희와 생명의 향기를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 프란체스코의 말처럼 우리는 진흙덩어리임이 분명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찬연한 빛을 품고 있기에 ‘진흙 등불’인 것이지요.
나는 프란체스코의 이런 표현을 참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신성을 품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요. 벼룩 같은 미물도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고, 들녘에 핀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도 하나님 안에서 존재를 얻는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모든 피조물을 골고루 사랑해야 할 이유인 것이지요.
토마스 트래헌은 <명상의 시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 무한한 아름다움을 비추는 거울이건만, 사람은 그것을 주목해서 보지 않는다. 이 세상이 장엄한 사원(寺院)이건만 사람은 그것을 주목해서 보지 않는다.” 시인 트레헌의 말처럼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에 눈뜬 사람에게 만물은 ‘무한한 아름다움’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몸 붙여 사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현을 드러내는 ‘장엄한 사원’이고요.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낙원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 치매환자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이제 사람들은 만물 속에 깃든 창조의 아름다움을 회상하지 못합니다. 장엄한 사원 중의 사원인 대자연조차 소유와 욕망의 대상으로 여겨질 뿐. 그리하여 신성한 하나님의 정원은 무참히 짓밟히고 훼손되어버렸습니다. 정원사를 자처하는 인간들에 의해. 더욱이 금화를 신으로 숭배하는 사이비정원사들에 의해. 그들은 하나님의 정원의 가치를 오로지 인간적 유용성으로만 가위질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습니다. 그 결과 하나뿐인 지구별은 파국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지요.
한 인디언 시인의 탄식처럼 우리는 모든 것이 지구별 위에서 사라진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마지막 강이 더럽혀진 뒤에야/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그대들은 깨닫게 될 것인가./인간이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면 너무 늦지 않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우리 속에 남겨 두신 ‘낙원 한 조각’의 기억을 회복해야 합니다. 풀 한 포기, 개미 한 마리를 내 형제로 보는 시력을. 청개구리 한 마리를 인간에 못잖은 창조주의 걸작으로 보는 시력을. 새앙쥐 한 마리를 기적으로 보는 시인의 경이로운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