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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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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버린 안심사에서 안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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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이 아니라 복원을 통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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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완주 대둔산 자락에 도착하니 안심마을이란 표지판이 나타난다. 장거리 운전을 마쳤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밀려온다. 오래 전부터 이 산아래 마음이 편안한 터에 옹기종기 모여 대대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을 것이다. 물론 이곳 뿐만 아니라 같은 이름이 경북 팔공산 자락에도 있다. 왕건(뒷날 고려 건국)이 후백제 견훤 군사의 포위망을 뚫고서 탈출한 후 안도의 한숨을 쉰 곳이 현재 대구시 동구 안심이라는 마을명칭의 유래라고 한다. 전란과 기근이 잦은 시대에는 백성들이 전국에 산재한 십승지(十勝地)를 찾았다. 이 역시 안심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다. 십승지는 안심마을의 또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절집도 마찬가지다. 안심마을 끝에 자리한 안심사(安心寺)는 신라 자장(慈藏)법사가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 어떤 일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평정심을 갖추고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곳)를 찾아 절을 지었다고 사적비에 전한다. 중국의 명문가 출신인 혜가(慧可)대사가 달마대사가 머물고 있는 심심산골인 숭산의 소림굴을 찾은 것도 불안한 마음을 해결하고자 함이였다. 그리고 대사의 한 수를 듣고자 눈밭에서 밤새도록 기다리면서 서있는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게 배운 안심의 비방책으로 뒷날 당신을 찾아온 승찬(僧璨)스님의 불안한 마음도 일거에 해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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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심을 위해 안심마을을 찾아왔고 마음의 번뇌를 해결하고자 찾아온 안심사가 도리어 안심처가 되지 못했을 때 그 불안감은 몇 배로 커지기 마련이다. 1950101일 육이오의 전화(戰禍)가 이 마을까지 미쳤고 근처의 사찰 역시 적군의 은거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무사하지 못했다. 사하촌에 살면서 그 광경을 멀리서 목격한 현재 팔순나이의 어떤 할머니는 오후 7~8시쯤 불길이 치솟았고 30리 밖에서도 보였으며 3일간 탔다고 증언했다. 조상대대로 다니던 우리 절이 재만 남긴 채 사라지자 주민들은 그 자리에 삼삼오오 모여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인간이란 괴로웠던 기억은 빨리 망각하기 마련이다. 망각을 통해 불안함을 털어버리는 방법을 자주 사용했다. 하지만 지역민들은 그런 쉬운 안심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복원을 통해 본래의 안심처를 만들고자 소매자락을 걷어붙인 것이다. 1966825일 안심마을을 비롯한 인근마을의 주민은 물론 반장 이장 면장 그리고 당시 안심사 주지 김창수 스님이 뜻을 모아 직인까지 찍힌 서류를 군부대에 접수했다. 권위주의 군사정부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답장이 왔다. 6.25때 안심사에 진주했던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이름까지 밝힌 회신이 도착한 것이다. 접수된 미확인징발재산신고서에 대하여 철발중소각(徹發中燒却 철수하면서 소각함)’이라는 답신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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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결과적으로 해당기관에서 소각사실을 인정한 매우 희귀한 기록유산이 되었다. ‘작전상 불가항력의 사유로 (징발재산)불인정이란 단서가 붙어 보상은 받을 수 없었지만 그 의미는 적지 않았다. 이후 복원을 위하여 역대주지와 지역주민의 정성을 지속적으로 모을 수 있는 끈이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국가의 지원을 받아 2층 대웅전을 2015년 낙성하기에 이르렀다. 소실 후 70년만의 일이며 청원 후 50여년만의 결실이었다. 현 주지스님은 그동안 인근 주민들의 합심과 역대주지의 노력이 무르익어 비로소 중심건물 한 채를 옛모습대로 완공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모든 공로를 앞세대 어른들께 돌렸다.

 

그런 전후사정을 기록할 기회 덕분에 묵은 서류까지 접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누렇게 바랜 갱지와 올드한 디자인의 노란 관공서 봉투도 만났다. 반백년 전의 국한문이 혼용된 민간의 탄원서 손글씨와 답신으로 온 한글전용 관공서 타자기 글씨가 어우러진 문서들을 교차로 뚫어지라 살폈다. 누구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아팠던 전쟁역사를 함께 극복하는 아름다운 사연이 함께 있기에 더욱 감동을 준다.

안심사(安心寺)와는 달리 인근도시인 전주 한옥마을의 경기전(慶基殿)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임금 초상화)과 조선왕조실록을 온전히 보관할 수 있었다. 임진란 때 전주사고(史庫)를 지키던 참봉과 인근 유생들이 합심하여 실록을 안심처인 정읍 내장사 인근의 계곡동굴로 피신시켜 이를 무사히 지켜낸 결과이다.

 

문화재청은 622일을 문화재지킴이 날로 정했다. 전주본 조선왕조실록이 내장산 용굴암에 도착한 날을 기념한 것이다. 당시 시골선비들이 피땀어린 노고를 통해 안심처로 옮겼던 일은 실록보존기적비를 세울만큼 역사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실록의 보존정신과 아울러 안심사 복원정신을 함께 되돌아보는 호국의 달 6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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