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한겨레신문 지면 휴심정 '쉼과 깸'칼럼>
» 난민 아이들을 만나는 배우 정우성. 사진 유엔난민기구 제공
#지난 2003년 인도를 순례하며 인도 중부 푸나강가에 있는 비노바지아슈람을 찾았을 때다. 간디의 제자로서 부단(토지헌납)운동을 펼쳐 스코틀랜드 넓이만큼의 토지를 지주로부터 헌납받은 비노바 바베가 머물던 그 아슈람엔 그의 제자 40여명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이 ‘시스터’로 불리는 독신여성 수도자들이었다. 그들이 기도하는 제단엔 인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으로 꼽히는 원숭이 형상의 하누만이 모셔져 있었는데 ‘멍키’라고 부르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런데 시스터들은 불경을 탓하거나 증오하기는커녕 10대 소녀처럼 웃었다. 자기 것이라곤 한평 땅도 내놓지 않으려는 지주들에게 갈 때마다 ‘이기심의 벽에 둘러싸인 완고한 성벽에도 작은 문이 있다’며 누구에게나 선의가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으며, 악의보다 선의를 보았던 비노바 바베의 제자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선악 이분법으로 피아를 구분해 적대케 하는 극단주의자들의 부추김에 부화뇌동하다 보면 세상 사람들을 천사와 악마로 나누게 된다. 공화당의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제치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순간 암울함이 몰려든 것도 이분법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트럼프가 카터나 클린턴이나 오바마보다 한반도 평화의 전기를 가져다줄 수도 있는 극적인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기대는 어느 때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몇달 전 <한겨레>가 ‘가짜뉴스’의 출처가 극우 개신교 단체라는 내용을 보도하자 해당 단체들이 연일 시위를 벌였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에도 몇사람이 시위를 계속했다. 한겨레신문사 앞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홀로 먹고 있는데, 시위하던 5명이 비를 피해 식당으로 뛰어들어왔다. 식사를 마치고 그들의 점심 값까지 계산하고 나오려는데,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얼른 “이분이 식사 값을 냈다”고 했다. 청일점인 목사가 일어나 “누구시냐”고 묻자 아주머니가 또 말을 가로채 “<한겨레> 기자”라고 했다. 그 목사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억울하면 이렇게라도 호소하셔야지요” 했더니 “고맙다”며 “우리도 이제 시위를 끝내려 했다”고 말했다. 그때 신도인 듯 보이는 여성들이 일어나 “<한겨레> 기자처럼 안 생기고, 참 좋으시네요”라고 했다. <한겨레> 기자는 훨씬 험상궂게 생겼을 거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었다.
# 멕시코 국경에서 강을 헤엄쳐 미국으로 가려던 중남미 이민자 부녀가 주검으로 떠올랐다. 한반도에서 ‘희망의 트럼프’와는 전혀 다른,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이 낳은 그늘이다. 그런 비극은 이번만이 아니다.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하는 배우 정우성씨는 난민을 돕는 활동을 하다가 엄청난 비난 댓글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정우성이 만난 난민 이야기’인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원더박스 펴냄)이란 책에서 그는 “누구라도 난민촌에서 난민들을 만나 직접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에겐 직접 만나 들을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고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고,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와 직접 만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행운의 기회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운아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