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연해주에서 활약한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1860~1920) 선생의 기념비가 순국 100돌을 앞두고 12일 우수리스크에서 제막됐다.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 의거의 숨은 후원자로 뒤늦게 이름이 밝혀진 그의 기념비는 고인의 유택을 개조해 지난 3월 개관한 최재형기념관에 세워졌다.
기념비에는 최재형이 그토록 염원한 조국의 광복을 형상화한 한반도 모양의 태극기가 새겨졌다. 2.5미터 높이 비석의 전면 오른쪽엔 ‘애국의 혼 민족의 별 최재형’이란 문구가 적혔고, 비석 앞쪽엔 ‘최재형 흉상’도 자리했다.
제막식에는 최재형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 공동대표인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최재형 선생의 후손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어 제막식 추모 공연에서는 소강석 이사장이 내년 최재형 순국 100돌을 기념해 만든 <자유의 아리아>를 테너 박주옥 교수가 불렀다. 또 창원국악관현악단의 특별공연과 함께 ‘최재형 장학생’ 출신인 바이올리니스트 닐루파르 무히디노바가 연주를 했다. 최 선생의 손자로 모스크바에서 엔지니어로 활동해온 최발렌틴은 “할아버지가 우수리스크의 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총살을 당한 뒤 자손들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사마라로 강제이주 당했고, 브루주아로 탄압을 받아 할아버지의 이름조자 꺼내지 못하고 살았다. 고려인들은 할아버지를 가슴 속에 기억해 내가 ‘최재형의 손자’라고 하면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곤 했다”며 “잊혀진 할아버지를 조국에서 되살려줘 감개가 무량하다”고 말했다.
최재형 선생은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와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9살 때 굶주림을 벗어나고자 이주에 나선 조부와 부친을 따라 시베리아 노우키에프스크로(연추)로 갔다. 10대 시절 가난을 이기지 못해 가출한 그는 항구에서 노숙하다 쓰러졌으나 러시아 선장 부부에게 구조됐다. 6년간 러시아 상선을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연추로 돌아온 그는 러시아군 통역과 군납업으로 큰 재산을 모으고, 지역의 도헌(군수)가 되었다. 그는 이런 부와 지위를 활용해 연해주 일대 한인촌에 30여개의 학교를 세우고, 우수한 학생들을 대도시로 유학을 보낸 뒤 이들이 다시 돌아와 학교에서 동포 아이들을 가르치도록 후원했다. 그는 1908년 독립운동 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한 데 이어 의병부대 대한의군에 무기와 숙식을 제공했고, 이듬해에는 동포신문인 <대동공보>를 인수해 사장을 맡았다. 특히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안중근이 결의를 다지고자 단지동맹을 한 곳도 최재형의 집이었고, <대동공보>의 기자증을 발급받아 신분을 보장받기도 했다.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때 그는 초대 재무총장이 되었다. 1920년 일제에 의해 순국한 최재형 선생의 주검과 묘지는 지금껏 찾지 못하고 있다.
그는 동포들을 워낙 따뜻하게 보살펴주어 러시아어로 ‘난로’란 뜻의 ‘최 페치카’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20년 4월 우수리스크에서 러시아 백군을 지원했다 타격을 입고 한인사회에 보복학살을 자행한 일본군에 체포당해 이틀 만에 순국했다. 그해 5월 임시정부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회가 열렸으나 주검과 묘지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순국 42년만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최재형은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하원 연설에서 안중근 의사 등과 함께 언급해 새롭게 주목받기도 했다.
소강석 이사장은 “내년 최재형 순국 100돌에는 선생의 후손들과 함께 기념식과 추모음악회, 국제심포지엄, 다큐멘터리·출판 기념회, 사진전 등을 열고 연해주 지역에 있는 신한촌기념비, 이상설유허비, 안중근의사단지동맹비 등 독립운동 유적들과 연계해 연해주 독립운동 역사탐방 프로그램을 만들어 젊은 세대들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