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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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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보다 별이 많다는 것을 누가 알아채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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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의 라닥 순례기 4편 - 하늘보다 별이 많다는 것을 누가 알아채리오

 

 

다음날 이른 아침을 때우고 점심도시락으로 감자를 으깨 넣어 구운 밀개떡 빠론따를 챙겨 받았다. 우리 일행을 마중 나올 지점에 이르니 이미 전날 도착한 두 스님이 말 세 마리를 끌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도 젊은 스님 둘이 나왔다. 최소한의 개인 짐과 링세 곰빠와 주변 마을에서 쓸 약품의 짐 보따리가 상당하다. 처음 걷는 기세가 당당하지만 이 힘이 계속 될지는 의심이다. 모두 스틱과 등산구로 제법 그럴싸하고, 다행히도 뙤약볕이 아닌 구름이 낀 걷기 좋은 날씨다. 점심 먹을 장소로 물이 맑게 흐르는 바위벽 그늘에서 말꾼 두 스님이랑 꿀맛 나는 점심을 끼니로 이 때 만큼은 행복해 하며, “누가 인생을 고(苦)라 했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다음부터 오르는 힘든 고개(뿌르피 라:3950m)라니 첫 번째 고개를 자기 힘 따라 넘기로 했다. 나와 야크님은 늘 꽁지다. 마지막에 걸어야 대원들이 힘들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은 산행 경험으로 알고 있는 상식이다.

 

<<첫 고개 쁘르피 라 고개 정상 마루에서, 두 신부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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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정상에서는 앞서간 모든 대원이 기다리며 쉬고 있다. 말꾼 두 스님은 이미 어느 지점에 기다리기로 하고 진즉 떠났다. 내려가는 길이 완전 지그재그로 무척 가파르다. 아니 무섭게 가파르다. 심 신부님은 무릎이 약하다며 제일 꽁지로 천천히 내려부친다. 평지에 닿으니 말을 초지에 풀어 두고 두 스님은 야크 똥 주워 모아 불을 지피며 소금차를 만들고 있다.

 

<<징첸에서 비박한 날, 아침으로 말 밥 축내고 다음 고개를 오르니 어제 넘은 고갯길이 환하게 보인다. 워메 징헌 놈의 비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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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를 스님들이 징첸이라고 부르는 비박 장소다. 얼마나 피곤한가. 각자 풀이 우거진 곳에 깔개를 삼으며 잠자리를 만든다. 레오 신부님과 빠리 스님은 유목민이 만들어 둔 흙집 바닥에서 자기로 하고 나머지 넷은 낭만을 즐길 요량으로 그냥 하늘을 지붕으로 삼는다. 라닥 지역은 거의 비가 내리지 않기에 비 걱정 없이 텐트 없이도 이런 잠자리를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누어서보는 밤하늘의 별무리는 그 얼마나 황홀한가. 인공 불빛이 없는 이 맑고 맑은 별무리를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늘 보다 별이 많다는 것을 누가 알아채리오. 이미 쟌스카 계곡에 들어와 밤마다에 밤하늘을 보고는 감탄과 찬탄을 얼마나 연발했었는지. 카르샤 곰빠에서 밤하늘에 뿌옇게 펼쳐진 은하수를 처음 보면서 지 교수님은 그게 구름이라고 빡빡 우겨대다가 매일 그와 똑같은 모습에 스스로 우기던 꼬리를 내리기도 했다. 아참 자리에 눕기 전에 비상식량으로 챙겨 가져온 <비록 말린 야크 똥으로 끓였지만> 우리 라면의 맛이라니. 누구하나 그만이란 사양의 말을 안 하며 퍼주는 대로 받아먹는데, 배고플 때 먹는 이런 맛을 누가 바른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마부스님 둘에게 따로 라면 두 개를 주었는데, “뻬 심뽀둑, 뻬 심뽀둑”을 연발 하는데, 정말 맛있다는 티벳 말이다.

 

<<가끔 이름 모를 고산 야생화, 어딘지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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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가 바쁘게 다들 자리에 눕는다. 필자에겐 이런 잠자리가 신기할 게 없다. 매 해 마다에 이런 경험을 하니까. 지금 이 길만 몇 번째인가 헤아려보니 여섯 번째이다. 반대로 거슬러 간 일이 두 번이었다. 첫 걸음은 1992년 철없이 호기심으로 넘었던 게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땐 트레킹이란 빌미로 그저 놀기 좋아 싸돌았었고, 그 인연으로 라닥의 실상을 알아차리게 되었으니 연장선상에서 매년 이런 의료 봉사의 길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이라도 저녁엔 쉽게 잠에 빠졌는데 이 밤은 생각이 깊어진다. 내일 들어가는 링세 곰빠의 체링 도르제 스님 때문이다.

 

작년 여름이니 꼭 일 년 전에 신장 결석이 탈이 되어 끝내 이승을 마쳤다. 칠십 전이라 더욱 애잔한 생각이다. 이 길을 다섯 번이나 함께 걸었었다. 만약 작년에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마땅히 그 스님이 말을 끌고 나왔을 거다. 2007년에는 한국에도 함께 나드리도 했는데 바로 필자가 이 길을 오갈 때 함께 한 인연이었기 때문이다. 늘 언젠가는 함께 티벳을 가자고 약속을 했었는데. 아, 인생은 무상하지요 체링 스님, 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이른 새벽 누가 깨우지 않아도 부스럭대며 자기 침구를 정리한다. 처음 말을 띤 지 교수, 간밤에 하늘을 두 개로 완전 가르는 별똥이 기가 막혔다는 즐거운 비명의 말을 쏟아낸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촌놈의 호들갑을 충분히 이해한다. 1993년 카일라스 성산 순례 길에서 티벳 장탕 고원을 가로지르며 걸을 때 밤마다에 많이도 보아온 별똥의 유희라니. 티벳 사람들은 별똥을 “깐다”라고 부르는데 “별이 쏜 화살”이란 뜻으로 표현이 너무 예쁘다.

 

오늘 올라 부칠 고개가 험하며 최고 높은 고개로 둘이나 된다. 서둘러 가야 될 길이라지만 그래도 아침은 챙겨 먹어야 되는데, 특별히 준비된 먹꺼리가 없다. 이곳 스님들의 주식인 짬빠(보릿가루)를 먹기는 어설프다. 두 스님이 소금차를 끓이는데 한쪽에 처박아둔 지저분한 식기에 뭐가 잔뜩 담겨있다. 노란 카레를 넣어 해 논 인도식 밥이 가득하다. 두 스님이 먹을 밥인가 물으니 세 마리 말에게 먹일 것이란다. 그럼 당신네 아침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물으니 계면쩍게 웃으며 바로 이 밥에서 조금 덜어 먹을 거란다. 맙소사! 필자야 먹는 문제라면 어떤 험한 먹꺼리라도 문제 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다른 우리 대원이 문제다. 일부러 지 교수한테 저 밥 먹을 수 있겠소 물으니 선뜻 손으로 집어먹는데 하는 말이라니, “스님, 이건 완전 기내식인대요!” 아무리 궁한 처지라도 말이 먹을 밥을 기내식이라 하다니. 결국은 모든 사람이 이 밥을 데워 함께 먹기로 했다. 챙겨온 밑반찬으로 장아찌가 조금 남아 있어 가능할 듯 했다. 우리가 먹은 밥이란 바로 우리 말 세 마리에게 먹일 아침 끼니를 우리가 축내는 꼴이 된 것이다. 지금도 그 때 누구 하나 군소리 없이 먹어준 우리 대원에 감사한다. 그런 밥을 어느 누가 먹을 수 있겠는가.

 

<<걷는 만큼 이익이다, 이 무슨 운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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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이렇게 때우고는 서둘러 길을 떠나게 했다. 해가 나기 전 그늘 속을 걸어 부쳐야 속력을 낼 수가 있다. 생각 보다는 수월하게 한 고개(네르쩨 라:3900m)를 넘으며, 어제 고갯길에서 내려부치는 가파른 길이 보인다. 누군가 저 길을 되돌아 갈 용사는? 하고 물으니 천만금을 준다한 들 온 길을 다시 되돌아 넘지는 못하겠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른다. 이때 순발력을 발휘, “바로 그거요! 지금 우리는 얼마나 편한 산행 길인지 알아야 해요. 이 두 스님은 말을 몰고 우리를 위해 어제 저 길을 넘었으니 우리의 두 배가 넘게 힘이 들었다는 것을!” 하는 필자의 말에 누구 하나 토를 못 붙인다. 이 말을 듣고는 쉬었다가자는 말도 없이 걸어 부치기만 한다.

 

<<퇴약볕 아래 점심이라니, 모두 지쳤는지 먹꺼리에 무관심인 듯. 모두 퍼진 듯 널부러져 앉아만 있다.

두 시님이 소금차를 원시적 방법으로 끓인다. 짬빠와  마른 야크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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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누만 라 고개 정상에서 북쪽의 끝없는 바위 산의 풍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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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신부님과 함께, 이 인연 영원하게 --- 생사를 같이한 전우니께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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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 스님과 야크님이랑 키념 촬영을 꼭대기 고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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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하나 마다에 기를 쓰고 넘으면 으레 오른 만큼 내려 부친다는 게 사실 맥 빠지는 일이다.

이제 넘을 다음 고개가 제일 힘든 고개(하누만 라 :4950m)로 악명이 나 있는 사람 잡는 고개다.  어찌 고갯길이 그리 지루하고 힘들게 되어 있다.  한 시경 물이 흐르는 데서 점심이라고, 그것도 뙤약볕 아래서 라니. 짬빠로 때우는 방법 외에 어떤 먹꺼리가 없다. 마른 야크 고기를 씹으며 끼니라고 때우고는 쉴 참 없이 오르도록 했다. 늘 말씀 없이 오르던 레오 신부님도 좀 짜증스런 말투로 이놈의 길은 끝이 나올 때도 되었는데 아무리 걸어도 그 자리가 그 자리라고 불평을 처음으로 하신다. 예상 보다 시간이 걸려 고갯마루 정상에 두시가 훨씬 넘어서야 올랐다. 저쪽 아래 절벽 산을 버티고 자리한 링세 곰빠가 아스라이 보인다. 또 레 쪽으로 협곡 끝이 뻗어 있는데 이 풍광은 참으로 대단한 볼거리다. 미국에서 유학중에 많이도 가봤다는 그랜드 캐년, 그보다 수십 배나 장엄하고 아름답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지 교수도 이쪽저쪽 사진 담기에 열심이다. 모두 기념사진이라고 많이도 찍어댄다. 이제 하산길이라지만 너무 가파른 내리막길이라서 오히려 위험이 따른다. 많이도 한참을 내려 부쳐야 마을의 파란 보리밭의 평탄한 길을 걸을 수가 있다. 필자는 일부러 제일 늦게 꽁지에 남아 길을 걸어 부쳤다.

 

평지에 다다를 즈음에 하얀 천막에 쉬어갈 간이 가게가 있다. 말꾼 두 스님이며 대원이 나를 기다린다. 가야할 대원들의 모습이 완전 녹초가 된 듯, 모두 주저앉은 모습이 패잔병 꼴이다. 애원어린 말투로 여기서 절까지는 아직도 다섯 시간을 더 가야 하니 하루 여기서 묵자는 제안이다. 나중에 알아냈지만 너무너무 피곤하고 지쳐 더 걸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며 필자가 오기 전에 서로 입을 맞춘 말이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온 길도 일반 여행객들 기준으로는 사흘 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내 고집으로 세 시간이면 들어갈 수 있다며 말꾼 두 스님부터 떠나도록 하니, 모다 억지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인데 정말 걷기 힘든 걸음 거리를 본다.  이제 조금 후에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아무도 모르는 채 말이다.

 

<<양떼를 만났는데 군기가 들어 있는지 순서대로 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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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둔덕을 넘는데 이제 내가 꽁지에 선다면 더욱 늦어질 것 같아 앞장서서 밤이 되기 전까지 곰빠에 다다르려 속도를 내어 걷기로 했다. 이건 잘못된 판단인 것을 후에 알게 된다. 지쳤을 때의 한걸음은 왜 그리도 힘이 드는지, 세 시간이면 닿을 줄 알았던 절이 늘 멀리만 보인다. 거의 마을 보리밭이 닿을 무렵 거대한 양떼를 만난다. 목동에게 물으니 700여 마리라고. 자기들끼리 질서 정연히 게울 다리도 건네며 보기에 참 평화롭다. 마침 마을에 들어서니 곳곳에 주민들이 나와 있는데 신통한 모습을 봤다. 열 집 정도의 주인인 듯 양들이 자기 주인을 쪼르르 찾아 또 다른 단체를 만들며 걸어가는 게 아닌가. 처음 보는 현상에 신통한 양떼라며 신기할 따름이다.

 

이제 저쪽에 곰빠가 보이며 스님들이 죽 나와 하얀 카타를 들고 우리를 맞이한다. 미안하고 송구스럽다. 노스님까지 모든 스님들이 다 나와 우리를 반기는 것이다. 그런데 빠리 스님이 올라오지 않는데 무려 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야크님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방에 들어와 누워버린다. 길가에서 토하면서 늦어졌단다. 나의 강행군 결정이 너무 무리한 것이다. 원래 이런 산행도 처음이라며 내색은 안 해도 힘들게 고개를 오르고 내렸다. 빠리에서도 학교 공부에만 치중하다 보니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진데 나의 섣부른 시간 단축 강행군이 탈을 만든 것이다. 아홉 시가 넘어서야 우리식 수제비 텐툭이 끓여 나왔다.  빠리스님은 수저도 못 든다.  완전 지쳐서 탈진 상태로까지 빠져버린 것이다. 쉬면 나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 고소 증세를 적응해낼 수가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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