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특별기고> 차마 못하는 마음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천도교의 2대 교주 해월 선생의
<내수도문> 가르침 중에 “육축이라
도 다 아끼며, 나무라도 생순을 꺾
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결국은
‘차마 못하는 마음’만이 파멸해가는
인간성과 인류문명을 구원하여 살
려낼 수 있을 것이다
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국립4·19공원 안의 둘레길에서 목도한 일이다. 주민들이 즐겨 찾는 묘소공원 안의 둘레길은 중앙의 넓은 녹색잔디와 대조를 이루면서 잔디밭과 주위 야산을 양편에 끼고 돌아가는 보행산책로인데 화강석으로 바닥을 깔았다. 깔끔하고 견고해서 좋지만, 한여름 낮의 열기에 노면의 돌이 달구어져 뜨겁기가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 아기 손가락 굵기만한 제법 큰 지렁이 한 마리가 방향감각을 잃고 달구어진 길 위에서 몸부림치며 온몸을 뒤척거린다. 걷기 운동 하던 어느 초로의 남자가 이 지렁이를 임시변통의 나무젓가락으로 집어들어 나무그늘 촉촉한 둔덕으로 던져주고 걷던 운동을 계속하였다.
잔설이 길 위에 아직 조금 깔려 있던 지난 이른 봄 어느 날, 같은 장소 4·19공원 근처 길가에서 목도한 일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보다 조금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길 가던 30대 아빠가 자꾸 뒤로 잡아끄는 아들의 손길에 발길을 멈춘다. 인적이 드문 길가에 참새 한 마리가 죽어 놓여 있었던 것이다. 눈물을 글썽이며 졸라대는 아이의 속맘을 알아차린 아빠는, 손수건을 꺼내 지푸라기처럼 가벼워진 죽은 참새를 집어 챙긴다. 아이는 죽은 참새가 불쌍했던지 집 안마당 나무 아래에 묻어주자는 것이다.
*출처 : 조계사 홈페이지
지구촌의 기후 붕괴로 유달리 춥고 더운 일기 변화가 심했던 올해 1월부터 8월 말까지, 내 주위에서 목격한 이 작은 두 가지 사건이 쉽게 잊히지 않고 내 맘을 보챈다. 뭔가를 생각해보라고 보채는 내 맘속을 헤아려보니, 저 유명한 고전 이야기 <맹자>의 ‘양혜왕 상편’에 기록된 ‘차마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에 관한 고사가 생각났다. 그 이야기의 핵심 내용인즉 이렇다.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03~221) 제(齊)나라 선왕이 맹자와 대면하여 왕도정치의 요체를 묻고 대답하는 맥락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예부터 군왕들은 부국강병책을 정치 요체로 삼으려 하는데 제 선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대사회에서 정치란 하늘 제사 드리는 행위와도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지라 제사 의례에 사용할 물건들을 성별하는 종교의식을 행하는데, 제물로 지정된 소를 잡아 그 피를 종이나 제기에 발랐다. 희생 제물로 끌려 나가면서 죽음을 감지한 소가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제 선왕은 “차마 볼 수가 없구나. 소를 죽이지 말고 양으로 대신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 고사에서 ‘차마 못하는 마음’이라는 유명한 사자성어가 나왔다.
‘불인지심’이라는 한문 단어를 순우리말로서 ‘차마 못하는 마음’이라 옮긴 이는 함석헌옹이다. 1960~80년대 한국이 근대화와 산업화의 격변 속에서 사람다운 본래 모습을 유보하거나 다 무시하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가치관이 팽배할 때, 함옹은 문명의 근본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동양고전 강좌를 많이 열었다. 함옹의 <맹자> 강의를 다시 반추하면서, 미물일지라도 뙤약볕 아래서 몸부림치는 지렁이를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그늘로 던져주던 사람, 차갑게 죽은 참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린아이, 그 둘의 마음에 공통으로 깃든 ‘차마 못하는 마음’의 정체를 성찰하고 싶어졌다.
맹자는 왕도정치를 학술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군왕이 그 마음에 이미 신비롭게 품고 있으면서 자각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는 심성의 비밀코드를 깨닫게 해주었다. ‘차마 못하는 마음’이란 약하고 고통 속에 처한 생명체를 보고, 느끼고, 함께 아파하는 양심의 울림이다. ‘측은히 여기는 맘’이다. 인류의 성현들 붓다·공자·예수가 설파하는 자비심·충서(忠恕)·사랑의 단초가 다름 아닌 그 마음이다. 그 마음은 한없이 여리고 아직 약하여 쉽게 무질러 없애버릴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이른 봄 새로 돋아난 잔가지 끝의 여리디여린 나무순 같은 것이다. 그 ‘단초와 새순’을 살려 나가면 사람이고, 억압하고 꺾어 죽이면 짐승이나 다름없다.
*MBC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중에서
인간 본성 속에 배아처럼 깃들어 있는 ‘차마 못하는 마음’ 혹은 ‘측은지심’이 어떻게 발생하고 자리잡게 되었는지 현대 학문은 아직 모른다. 다만 추론하는 것은 이 지극히 미묘하고 여린 마음은 인류라는 생명종이 길고 긴 생존투쟁을 겪으면서 약육강식의 동물적 본성을 이겨내고 서서히 싹틔운 매우 귀하고 신묘한 심령적 획득형질이라는 점이다. 종교들은 자기 전통을 따라서 그 품성을 불성, 하나님의 씨, 본연지성이 지닌 ‘내면의 밝음, 내면의 소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와 비교할 때, 근현대 사회는 인권신장과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점진적 발전에 힘입어 문명의 진보가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국시대 군왕들의 통치철학인 부국강병책처럼 21세기 국제정치와 국내정치 현실에서 ‘부국강병, 약육강식’의 통치철학은 바뀐 것 같지 않다. 다만 더 외교적이고 수사적이고 치장하고 변장하면서 문명이라는 의상을 걸쳐 입었을 뿐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차마 못하는 마음’은 귀찮은 것이고 무시해 버려야 할 것으로 취급된다. 그런 맘을 교육적으로 격려하고 육성하면 국가는 약해져서 국제경쟁에서 패배하고 우리집 자녀는 남보다 뒤처진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기업 회사 신입사원 훈련과 자녀들에게 극기훈련 명분으로 병영에 입소시키는 경우까지 생겼다. 극기훈련은 될지 모르나 창의적 발상력은 억압되고 ‘차마 못하는 마음’은 그 씨눈마저 상해를 입을 것이 자명하다.
남북한 사회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로 ‘차마 못하는 마음’을 집단적으로 제도적으로 말살하고 조롱하는 사회풍토를 강화해왔다. 전쟁문화와 전쟁담론, 군사주의와 군사문화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남북한 7000만 민족 심성과 의식구조 안에 내면화돼왔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차마 못하는 마음’은 도덕적 사치이거나 감상적인 나약한 품성이며, 결국 생존경쟁 사회에서 패배자로 내몰린다는 생각을 갖도록 국민을 휘몰아갔다. 한국전쟁은 부끄러운 ‘형제살인’ 행위였으며 베트남과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의 파병은 ‘생명 살상’의 반인륜적 행동이라고 이 땅의 종교들은 말하지 않았다. ‘차마 못하는 마음’을 키우고 지켜가는 일이 종교가 땅 위에 존재하는 제1목적이 아니던가? 국가주의에 아부 타협만이 아니라 전쟁국가의 무운 강성을 축복하며 ‘십자군의 성전’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했다.
*영화 <고지전> 중에서
신생대 제4기 후반 지금부터 대략 250만년 전, 빙하기와 지구 변화를 극복하고 진화해온 포유류 생명나무 가지 끝에 인류종이 창발했다. 그리고 인류종은 맘속에 있는 야수성을 또다른 신비한 힘인 ‘사랑’이라는 힘으로 이겨내면서, 단단한 목질에서 새순이 봄에 돋아나듯이 ‘차마 못하는 마음’을 싹틔웠다. 대략 10만년 전, 모계 원시 농경문화가 발달하면서 긍휼심을 뿌리로 하는 ‘차마 못하는 마음’은 점차 사람 생명의 특성이 되었다. 그 맘은 군복무 대체제도를 만들어 달라고 감옥에서 기다리는 젊은이의 가슴속에 지금 살아 있고, 버려진 애견들을 불쌍해서 주워다가 움막 같은 집에서 함께 사는 폐지수거 할머니 마음 안에 살아 있다. 그리고 거짓 증언자들의 위증을 못 들은 것처럼 ‘차마 못하는 마음’ 때문에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증언하는 권은희 전 서울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양심 속에도 살아 있다.
천도교의 2대 교주 해월 선생의 <내수도문> 가르침 중에 “육축이라도 다 아끼며, 나무라도 생순을 꺾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가출한 십대 소년들이 집단적으로 같은 또래의 소녀를 윤간했다는 귀를 막고 싶은 뉴스가 들리는 우리 사회이다. 결국은 ‘차마 못하는 마음’만이 파멸해가는 인간성과 인류문명을 구원하여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