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전스님의 라닥 순례기 5편
이튿날 이 절 모든 스님들과 상견례가 있었다.
원주 격인 스님이 라닥 말과 영어로 말을 하니 우리 대원들에게 따로 통역이 필요 없다. 오랜만의 방문이라서 일부러 맘 내어 준비한 갖가지를 공양 올리는데 누구는 영양제, 누구는 수건과 양말, 누구는 비스켙, 누구는 손톱 깍이와 겨울 털모자 등등 뭐라도 한 가지 씩 드릴 수가 있어 구색이 맞다. 거기에 각자 알아 분수에 맞는 보시까지라니 이 외딴 곰빠 스님들에겐 오늘이 최고의 명절날 일수밖에, 이국인이 와서 뭔가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신기한가.
<<제일 연장자 노스님(80세) ;쏘남 남걀 스님께 직접 손목시계를 채원 드립니다.>>
<<쏘남 남걀 노스님의 얼굴에 그 한자리 80년 삶의 주름살이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최고의 관심꺼리는 손목시계다. 한국에서 쓰지 않는 헌 시계를 모아 새 약을 갈아 끼워 이런 외딴 절 스님들께 드린다. 아마 매년 이삼백 개의 헌 시계를 날라 쓴다. 꼭 나이순으로 자기 맘에 맞는 시계를 고르도록 드리기에 누구나 좋아한다. 한국 곳곳의 주지스님들의 배려로 인도 땅까지 날라 와 쓰이는 이 헌 시계를 받아쓰는 이들에게는 대단한 선물이자 재산이기도 하다. 더러 어떤 신도 분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중국제 아라비아 숫자로 된 큰 손목시계를 전해주기도 한다. 이 시계만큼은 극 노인들에게 공양 올린다. 시계를 차보고는 그리도 좋아하시는 게 꼭 어린 아이 같다.
<<동안의 사미승 몇 명, 완전 촌닭이군요. 차렸!!! 입니다.>>
<<바로 이 꽃이 해당화, 한국 꽃 보다는 훨씬 작은데 향기는 대단 합니다.>>
어느 독지가 분의 배려로 이 골짜기 두 곰빠에 젖소 한 마리씩, 그리고 스님들 공양꺼리로 좀 나은 쌀과 달(인도 콩)등 식용으로 쓰이도록 제법 큰 보시를 할 수가 있었다. 오리정도 아래쪽에 비구니 스님 절이 있는데 열악한 환경에 따로 먹꺼리용 보시여서 마음이 훈훈해진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해 둘게 있으니 이 절의 물맛이다. 산꼭대기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천연수인데 누구나 물맛에 감탄이다. 물을 컵에 따라두면 꼭 사이다를 따른 듯 컵 안에 기포가 서리며 없어지지 않는다. 거기에 불어오는 바람결에 해당화 꽃향기는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만든다. 지천에 깔려 피어있는 해당화 꽃으로 이런 꿈같은 향기로움은 우리에겐 축복일 뿐이다. 지구과학에서 라닥 지형이 특이한 게 1억 8천만 년 전에 인도 대륙이 밀어붙여 바다가 융기되어 생성된 지형이란다. 높은 곳의 호수가 지금도 짜디짠 바닷물 호수이고(어떤 곳엔 진화가 덜 된 갈매기까지 날고 있다.) 곳곳에 해당화는 입증이라도 하듯 그 옛날 바다였음을 말해준다. 주민들의 악세 사리 중에 단연 최고의 멋은 하얀 소라껍질이나 산호이다. 지금도 종종 땅속에서 찾아진다.
<<이리 많이도 지천에 해당화 꽃이니 공기가 모두 꽃향기 랍니다.>>
사흘을 머무는 동안에 마을 주민들의 진료는 그치질 않는 게 당연, 꼭 누군가가 약이며 안경이나 뭘 요구한다. 자기 약만 받아가는 게 아닌 막말로 사둔에서 팔촌까지 죽 챙겨 가는데 그 마음이 외려 고맙다.
<<약 받으러 온 마을 아줌마 입니다. 모다 순하게 보이는군요.>>
이제 떠나야 한다. 오늘 걷는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공마 마을, 그러나 빠리 스님이 잘 걸을 수가 있을까. 이젠 짐이 줄어 말 두 마리로 출발이다. 걸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그런대로 갈 듯 하단다. 그러나 언덕배기 불탑까지 오르더니 다시 토악질인데 나올 것이 더 없는지 파란 위액까지 토해낸다.
<<또 말을 타고 가야하는 우리 빠리 시님; 쏘르본느 대학교만 댕기는게 수행이 아니라니깐요!!!>>
<<지나온 고갯길이 아슴아슴 합니다. 금생에 다시 넘을 길이 될지요?>>
탑 아래 그냥 주저앉는다. 빈말 한 필을 챙겨오도록 했다. 안장이며 고삐를 굳게 묶어 만일에 대비한 이동인데 제발 낙마(落馬)만 안하기를 바란다. 안장 앞뒤를 꼭 잡을 것을 누누이 말한다. 일행은 진즉 올라갔고 나와 야크님이 말 뒤를 따라간다. 속도가 아주 늦다. 낮은 둔덕을 넘을 때마다에 새롭게 드러나는 적토색 산 빛이 과연 아름답다. 스님은 죽을힘을 쏟는가보다. 중간에 내려 소피보면서 또 토악질이다. 내심 걱정이다. 정말 방법이 없다. 그저 다음 마을까지 무사히 들어가 쉬어야 한다. 어찌어찌 마부스님의 배려로 큰 탈 없이 마을에 들어섰다. 일행 모두 걱정의 안색이다. 그냥 자리에 눕는데 사색이다. 얼굴이 백지장이 되어가니 더욱 긴장이 되고, 돌이켜보니 다 나의 강행군 행보 결정으로 이런 탈을 낸 것이다. 저녁이 되어도 스님은 누워만 있으니 더욱 답답할 수밖에, 번뜩 한국인으로서 민간요법이 떠오른다. 즉 우리에게 누구나 인자가 내재되어 있다면 그 중의 하나가 된장과 우리 쌀 곡기의 효험이리라고. 마지막 비상용 쌀을 푹푹 곤 미음과 된장 풀은 국물이라면 뭔가 힘을 차릴 것 같은 예감이 과연 적중을 했다. 이 된장은 판매용이 아닌 아는 원불교 정녀님이 손수 담아 챙겨준 순수한 우리 된장인 것이다. 곡기와 된장의 힘이 스님에겐 약이 되었다.
<<공마 마을 묵을 집 주인. 그 옛날 몇차례나 그 집에서 오가며 먹고 잤답니다.
너무 오랫만의 상봉에 안죽고 이리 살아 계싱만요잉. 바로 이 할배는 작년 돌아가신 체링 도르제 스님의 형님이지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핑 했답니다. 그 곳 삶의 고생이라니요. 부인은 몇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야크님께도 환영의 카타를 걸어 줍니다.>>
<<그러고는 너무 반가워 다시 딱 껴안습니다.>>- 이런 좋은 사진을 찍어주신 지 교수님께 이 자리에서 타앙큐우 따따로 함돠잉.
자고 나니 혈색이 돈다. 이제 가파른 비탈길 고개 하나만 넘으면 우리 찌프차가 기다리는 것이다. 다시 말을 타도록 했다. 앞뒤에서 만일을 대비한 조심스런 걸음마다에 저절로 염불이 나온다. 만일 이 비탈길에서 낙마나 어떤 실수라면 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이고, 제발 우리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드디어 고개 꼭대기다. 이젠 이 지긋지긋한 고갯길은 없는 것이다. 우리를 끝까지 배려해 주는 말몰이꾼 스님과 다른 배웅객 스님들에게 충심어린 감사의 말씀은 물론, 각각 보시를 드리며 우리의 마지막 예를 표했다. 하얀 천의 스카프가 마지막 순례자에게 축복의 상징으로 모두의 목에 걸렸다.
<<공마 마을의 힘찬 아침 입니다. 보리밭과 멀리 민둥산이 뭔가의 느낌을 주는군요.>>
<<이 고개를 마지막으로 넘어야 됩니다. 가파라서 낑낑 대고 아예 위아래 안보고 그냥 땅만 보고 가야 편습니다.
빠리시님은 또 말을 타야 했구요. 이 고개 넘으면 우리 찌프차가 와 있습니다.>>
<<우리가 잔 집의 부엌 입니다. 실베스델 신부님은 그냥 혼자 부엌에서 잤답니다.>>
아픈 스님을 첫 좌석에 모신다. 이제 비포장인 어설픈 길로 오천메타 급 두 고개만 넘으면 문명권에 들어서며 좋은 포장길을 만난다. 그 옛날엔 늘 이 두 고개(쌩게 라:5050m 와 시리시리 라:4680m)를 걸어 넘어야 했었는데, 주 정부에서 링세 곰빠까지 차량 도로를 건설 중에 있다. 덕택에 나흘 걸음걸이를 단 몇 시간으로 큰 길에 닫는다. 라마유루 곰빠 까지 네 시간이면 도착한다고 했지만 일곱 시간이 걸려 첫 인가에서 때늦은 점심요기를 해야 했다. 벌써 세 시다. 음식이랄 게 아무것도 없고 툭빠(국수)가 있다하여 잔뜩 기대하고 기다리기를 한 시간이나, 그런데 나온 음식이란 양이 너무 적은 달랑 인도 메기라면 한 그릇씩이다. 실망도 실망이지만 라면 하나 끓이는데 한 시간이 걸리다니, 그래도 배가 고프니 군말 없이 먹는 게 아닌 입에 몰아넣는다.
<<차로 넘은 시리시리 라 고개 입니다. 워메 정말 징헙니다. 그 옛날엔 늘 이 고개를 걸어 넘었습니다. 앞발 뒷발 다 쓰면서라잉.>>
드디어 문명권에 들어와 좋은 포장길을 만나니 그리 편다. 이젠 걱정이 덜하다. 우선 오는 중에 차량 고장이나 생긴다면 도무지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차는 빠둠에서 일차 손 봤고, 공마쪽으로 오다가도 타이어가 찢어지는 사고로 바퀴를 통째로 교체하고 왔었으니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나 조마조마 했던 것이다. 또 총 책임 인솔자로 어찌 마음 편케 이동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