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복음과상황 274호 커버스토리] 2013년 08월 21일 (수) 오영임 goscon@goscon.co.kr
▲ 1년간 머문 밴쿠버 외곽의 셋집 마당에서(사진제공: 오영임)
그때가 적당한 시기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은 청년 사역과 더불어 싸워왔던 논문을 마쳐야 하는 시기였고, 나는 일반적인 회사원들이 마지막 승부를 거는 연차에 들어와 있었다. 휴직 사유가 안 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설마 했던 내게 회사는 “다른 사람과의 형평성을 고려할 때, 개인적 사유의 휴직 케이스를 만들기 어렵다”라는 최종 입장을 알려왔다. 큰아이는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었고 얼떨결에 대한민국 ‘대입 레이스’에 진입해 있었다. 전세 뺀 돈으로 타지에서 새로운 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 형편을 아는 이들은 그 결정을 걱정했다.
‘그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시간
그러나, 우리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능력을 넘어서는 많은 일들로 지쳐 있었고, 항상 조금씩 과한 사역을 해내던 남편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양’이 아니고 ‘질’이라고 우겨 왔던 나였지만, 솔직히 내게 그 ‘양’은 무시할 수 없는 절박함이었다. 큰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 시간이 더 가기 전에 우리 가족 모두에게 특별한 시간이 필요했다. ‘가족 안식년’이라고 이름을 짓고 보니 그럴듯해 보였다. 캐나다에서 남편이 신학연수를 할 수 있는 곳에 입학허가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 이 땅의 많은 것과 단절하고 우리는 캐나다로 향했다. 우리가 간 곳은 밴쿠버. 다운타운은 아니고, 광역 밴쿠버에 속하는 한적한 외곽 도시였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뭐예요?”
그곳에서 가장 자주,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물론 인상적인 것 참 많았다. 이곳 사람들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 나무가 저렇게 빽빽할 수 있다는 것, 의외로 길었던 겨울의 축축한 우기, 사람들이 항상 관대하지만은 않다는 것, 보행자는 언제나 어디서나 모든 차에 우선한다는 것….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제쳐두고, 나와 남편이 늘 이야기한 것은 ‘시간’이었다.
우리에게는 시간의 흐름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정착 초기 한 달간 우리를 당혹하고 답답하게 한 주범이기도 했다. 밴쿠버 외곽에서 머물렀던 1년간, 그곳의 시간은 한국보다 세 배 정도 느리게 흘러갔다. 한국에서는 하루에 세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는 하루에 한 가지를 겨우 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의 언어상 한계도 한몫 했을 것이다. 느린 처리 속도에 비해 일이 정확하게 진행된다는 느낌은 있었다.
시간의 사용에 대해 기억에 남은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현지 사람들과 한국에서의 삶을 이야기 하는데, 한 사람이 유독 자세히 묻는다.
“저녁 먹고 나서도 일하곤 한다고? 주말에는? 그 때 네 기분은 어땠니?”
그 사람이 마지막에 주저하면서 한 말은 이랬다.
“너 혹시 그 일로 클리닉이나 상담을 받아본 적은 있니?”
난 몇 초간 멍해 있었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잠시 뒤 나는 알았다. 그 사람은 나를 워크홀릭(일중독) 환자로 본 것이다. 난 당황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했다.
“아니, 그게… 나뿐 아니라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일하거든.”
역시, 교육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받았던 약간 당황스러웠던 질문이 생각난다. 남편이 학생 신분이어서 아이들을 현지 공립학교에 무료로 보낼 수 있었다. 이곳은 초등학교 1학년이나 고등학교 3학년이나 하교시간이 똑같이 2시 30분이다. 한국의 고등학생은, 수업이 끝난 후에도 학교에 남아서 늦게까지 공부한다고 이야기 했을 때, 한 중년 부부는 놀라면서 내게 물었다.
“아니, 그럼 그 아이들은 언제 놀아요?”
“아, 놀아야죠…. 그러게요… 짬짬이 놀긴 잘들 놀아요….”
“그런데, 학교에서 그렇게 아이들을 붙잡아두고 집에 보내지 않는데 학부모들은 항의하지 않나요?”
“예, 뭐… 굳이 항의까지는….”
대화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한국의 부모들은 학교가 공부를 시키지 않으면 항의를 하죠”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사실 이곳에서도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여전히 각종 학원이 성행하고 있었고, 기숙 학원 전단지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만약 아이를 1년 꿇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런 것에 휘둘렸을지도 모르겠다는 가슴 서늘한 생각을 했다.
시간을 ‘죽이다’와 ‘누리다’의 차이
한국인 친구를 만나 점심을 같이 했다. 친구의 경험담도 인상적이었다. 밴쿠버 올림픽 준비기간 동안에 다운타운에서는 금메달을 만져볼 수 있는 이벤트가 열렸고, 친구 가족도 그 긴 줄에 합류했다고 한다. 결국 무려 여섯 시간을 기다렸다가 메달 한번 만져보았다는데, 인상적인 것은 그 시간 동안 아무도 짜증내지 않더라는 것. 한편에서는 기다리는 사람들끼리 벌이는 즉석 공연이 열렸고, 사람들은 공연에 참가하기도 하고 박수도 치면서 그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친구와 헤어진 후, 우리 가족은 저녁에 근처 공원에 가기로 하고는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계산대에서 일하는 직원은 하나하나 물건을 찍고, 봉투에 차곡차곡 ‘예쁘게’ 담는다. “날씨 참 좋죠?” 이런 참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뒤에 줄 선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손 내밀어 직접 정리를 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아무도 불평하거나 우리를 주목하지 않는다.
공원으로 갔다. 사람들은 이동식 의자 두 개, 혹은 큰 타월을 가지고 와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옆에선 근육질의 건장한 청년 네 명이 각자 자기가 마실 생수 한 병씩을 가져다 놓고 사각형을 만들고 선다. 한 시간 동안 그렇게 그다지 긴장감도 없는 원반 돌리기를 하며 즐거워하다가 훌훌 자리를 뜬다.
이런 모습들은 내게 익숙한 장면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시간을 참 많이 ‘죽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사실 그 시간을 그저 ‘누리고’ 있었다. 물론, 이를 단지 한국과 캐나다의 차이로 단순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은 대도시 서울이었으나 여기는 외곽이고, 한국에서는 직장생활을 했으나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고. 그러나 사회 전체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달랐던 것은 분명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마저도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이곳의 여유 있는 시간의 흐름이 인상적이었다는 말에, 모임에 같이 있었던 온두라스에서 망명 온 아저씨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느리다고? 난 처음에 여기 왔을 때 이 빠른 속도에 적응하느라 버거웠는데!”)
그곳에 갈 때 난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갔고, 1년을 잘 활용하면 그 일들을 다 성취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지금 보면 참 황당할 정도로 많은 목표를 잡았고, 물론 그 리스트의 절반도 이루지 못했다. 내가 한국에서처럼 시간을 쪼개어 계획을 세우고,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에 오늘 한 일과 못한 일, 내일 할 일을 정리하며 관리했으면 어쩌면 더 많은 일을 이루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굳이 변명하자면,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이곳에선 좀 다르게 살아보자.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말아보자. 경험하지 못했던 삶의 양식을 한번 경험해 보자.
▲ 자주 찾아간 크레센토 해변에서(사진제공: 오영임)
저녁 먹고 날씨가 좋으면 돗자리 하나 들고 애들 뒤에 태우고 집에서 20분 거리의 해변으로 갔다. 처음에는 해변 공원에 갈 때마다 주식부터 후식까지 싸가며 피크닉 준비를 풀코스로 했지만, 나중에는 커피와 돗자리만 달랑 들고 가서 노을이 지는 순간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있었다. 깜짝 놀랄 만큼 비싼 가격 때문에 외식은 엄두도 못 냈고,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의 집으로 초대했다. 처음에는 손님이 집에 온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고 준비에 쩔쩔맸으나, 나중에는 뭐 그냥 먹을 것 하나씩 싸오라고 하고 나누어 먹는 편한 일상이 되었다.
교회에서의 시간 흐름도 많이 달랐다. 보통 이곳의 현지 교회는 많은 프로그램을 세워 진행하지 않았다. 대다수 한인 교회가 예배를 오후 2시경에 시작하는 것은, 오후 프로그램이 없는 현지 교회와 건물을 나누어 사용하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나는 비로소, 조금씩 우리의 이전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이 없어 쩔쩔 매면서도 바쁜 것이 은근한 자부심이었던 모습. 시간을 쪼개 쓰며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물을 얻는 것을 즐겼던 모습. 사역조차도 전투적으로 하고, 늘 파이팅을 외쳤던 우리 모습. ‘내가 왜 그렇게 살았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해보았다. 나는 모험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이미 익숙해진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편한, 관성의 법칙이 유난히 강하게 적용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곳을 뜨지 않았으면 이런 것들을 알 수 있었을까? 물론 그럴 수 있었으면 아주 좋았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기존 삶의 공간 및 시간과의 단절을 통해서 비로소 이것들을 알 수 있었다.
▲크레센토 해변 노을 속의 두 딸(사진제공: 오영임)
1년이 지난 후 한국에 돌아온 지 보름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한국의 빠른 속도에 난 다시 적응하고 있으며, 이것이 주는 달콤함을 다시 맛보고 있다. 어디를 가도 연결되는 버스와 지하철, 몇 분 후에 버스가 올 것인지 바로 알려주는 디지털 서비스, 식사 준비하다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아파트 앞 마트에서 사올 수 있는 편리함. 밥하기 싫을 때 전화 한 통이면 즉시 배달되는 꿈 같은 음식들. 인터넷에서 책 주문하면 바로 오후에 받아볼 수 있는 경이로움.
그 새 자신감은 조금씩 흐려지고 있으나, 나는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남보다 더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이상 내게 큰 자랑이 되지는 않을 것이며, 빡빡한 일상을 은근히 즐기면서 달콤한 연민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바쁘게 살 수 있겠지만 쫓기지 않을 것이며, 소중한 사람을 위한 시간과 나의 영성을 우선순위의 희생양으로 삼지도 않을 것이다. 이 사회가 당연하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들에 천진한 얼굴로 “아, 그렇군요. 근데 전 좀 생각이 다르거든요”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 있다는 것은 아니고, 그럴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거다. 사람이 한 번에 뭐 그렇게 많이 바뀌겠는가.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바뀌어가는 것이지. 그래, 이런 변화조차도 서두르지 않으려고 한다.
오영임
목회자인 남편과 규영(고 1), 인영(초등 6)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안식년을 위해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있었던 자신을 스스로 신기해하며, 가볍게 살 수 있는 앞으로의 삶을 기대하고 있다. 18여 년 동안 다녔던 직장을 그만두고 온 가족이 1년간 타지에서 머물다 얼마 전 돌아왔다. 절대적으로 여겼던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있었던 자신을 스스로 신기해하고 대견히 여기며,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생활을 기대하고 있다.
*이 글은 복음과상황(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