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의 아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기관
지난 시간에 고대 이집트의 서기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기관을 알아볼텐데, 두 문명의 대조적인 문자생활을 인식하는 기회가 되길 희망한다. 독자들은 이 글에서 몇몇 이름난 서기관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위키피디아에도 이름이 올라 있어, 후대의 지식인들과 여전히 경쟁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여성 서기관도 있다.
1.두 문명의 대조적인 문자 생활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는 고대 근동 문명을 이룬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나톨리아 반도나 레반트 지역 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존재감의 면에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 두 지역은 여러모로 닮기도 했지만, 다른 점도 많았다. 특히, 문자와 관련되어 두 문명은 대조적이었다.
지난 글에 밝힌 대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에 갈대 붓으로 글씨를 ‘그렸다’. 하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진흙판에 갈대 첨필로 글씨를 ‘눌러 찍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쐐기문자를 찍기 위해 이집트와는 달리 잉크가 필요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따금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방법이 현대의 디지털 글쓰기와 닮았다고 느낀다. 스마트폰에 글을 쓰는 이른바 ‘터치펜’은 짧고 뾰죽한 막대기를 손에 들고 잉크 없이 써 나간다는 점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방식과 공통적이다. 실제로 ‘터치펜’은 영어로 ‘첨필’(stylus)이라 부른다. 그리고 컴퓨터로 글을 쓸 때는 잉크 없이 컴퓨터 자판을 ‘눌러 찍는다’.
2. 토판과 첨필
쐐기문자를 찍는 토판은 진흙판이다. 초기에는 그냥 진흙을 쓴 것 같다. 자연적인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대로 갈 수록 비교적 정제되고 깨끗한 진흙판이 사용된다. 대개 ‘진흙판의 질’ 은 ‘문서의 격’과 비례한다. 궁전이나 신전에서 만든 서사시나 역사적 문서는 가장 깨끗하고 좋은 재료를 사용한다. 그런 재료에 적힌 글은 표준 어법에 근접하고 오탈자도 적다. 아마도 경험이 많은 서기관이 ‘원본’에 따라 여러번 연습한 과정을 거친 다음에, 정성스레 찍어나갔을 것이다.
아카드어로 토판을 지칭하는 단어는(tuppu) 문서, 편지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말은 수메르어에서(DUB) 물려받은 말이다(그림).
그림: ‘토판’을 의미하는 수메르어 DUB.
출처: ePSD(The Pennsylvania Sumerian Dictionary)
쐐기문자는 토판에 첨필로 찍는다. 첨필은 끝이 뾰죽한 작은 막대기인데, 초창기에는 갈대를 그대로 사용한 것 같다. 아카드어로 첨필을 “토판의 갈대”(qan tuppi)라고 하는데, 이 말도 역시 수메르어(GI.DUB.BA.A)에서 물려 받은 말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갈대 끝을 삼각형으로 뾰죽하게 다듬어서 사용했고, 재료도 나무, 상아, 뼈, 금속 등 다양하게 썼지만, ‘토판의 갈대’는 첨필을 가리키는 말로 계속 사용되었다.
사진: 히타이트의 쐐기문자 청동판(Bronztafel)
촬영: 주원준 2007 앙카라
하지만 중요한 문서는 돌이나 금속에 새기기도 했다. 사진은 히타이트 임금 투드할리야 4세(Tudhaliya IV)와 타르훈타샤(Tarhuntassa)를 다스리던 쿠룬타(Kurunta) 간에 기원전 1235년 경에 맺은 계약을 담고 있다. 계약의 당사자는 숙질간 아니면 사촌간으로 추정한다. 왕자들의 통치영역을 규정하는 중요한 약속이기에 이렇게 청동에 정성스레 새겼고, 이 계약의 증인으로 수많은 신들이 나열된다. 이런 ‘신들의 목록’은 종교학자에겐 매우 중요하다. 그 신의 호칭과 언급되는 순서 등으로 히타이트 만신전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서에서 이스라엘의 야훼는 어급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토판에 뚫린 구멍과 쇠사슬이다. 아마 이 문서를 매달아 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토판에도 이따금 이렇게 구멍이 뚫린 것이 발견된다.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토판을 매달아 두는 관습 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3. 학교, 토판의 집
고대 메소포카미아에도 학교가 있었다. 학교와 관련된 아카드어를 보면, 그들의 학교 생활 일부를 짐작할 수 있다. 아카드인들이 선대 문명인 수메르 문명에 대해 존경심을 지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수메르인들이 사용하던 낱말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학교와 관련된 낱말들은 우리 한국인의 정서와도 그리 멀지 않다.
토판을 의미하는 낱말(tuppu)이 문서와 글을 의미함은 위에서 보았다. 학교를 아카드어로 “토판의 집”(bit tuppi)이라고 하는데, 이는 ‘글의 집’으로 옮길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이 낱말은 서당(書堂)이라는 말과 문자 그대로 거의 똑같다. 옛부터 학교는 글을 배우는 집이었나보다. 이 낱말도 본디 수메르어였다(E.DUB.BA.A).
그들은 서당에서 서기관이 되는 모든 것을 배웠다. 처음에는 진흙판을 준비하고 첨필을 만드는 법부터 시작해서, 점차 글자와 문장을 암기하였다. 모든 교육이 끝나면, 학생은 언어, 문학, 수학, 음악 등 네 분야의 글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길러진 “글의 집의 아들”(mar bit tuppi)은 ‘서기관’을 뜻하는 말이었다. 서기관은 ‘학생’이었던 것이다. 이도 역시 수메르어에서 전승된 낱말이었다(DUMU E.DUB.BA.A).
아카드인들은 학교에서 수메르어를 배웠고, 이런 전승은 바빌론과 아시리아 등에도 지속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아카드어어나 아람어를 ‘구어’로 사용하고, 학교에서는 수메르어를 배우는 일종의 ‘이중언어 생활’이 자리잡았다. 구어로서 명맥이 끊겼지만, 종교적 문헌 등에서 수메르어가 비교적 후대까지 잘 보존된 이유라면, 역시 ‘교육의 힘’과 수메르에 담긴 ‘내용’을 들어야 할 것이다.
선생님은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자, 곧 “선생님”을 뜻하는 ‘움마-누’(ummanu)는 ‘장인’, ‘전문가’를 뜻하는 말이었고, ‘학자’를 의미할 수도 있었다. 이 말은 ‘어른, 성인’(ummanu)을 뜻하는 말과 무척 닮았다. 궁전이나 신전의 움마누는 대서기관이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학교 생활과 관련된 유물이 제법 출토되었다. 학생들은, 뒤에서 거론할 훌륭한 서기관의 작품을 베끼며 연습했던 것 같다. 이따금 학생들이 사용했을 법한 연습용 토판도 나왔는데, 토판의 간기(刊記 colophon)에 사용된 다음의 단어는 용도를 추측하게 한다: “낭독용”, “교육용”, “읽기용”, “자습용”.
학교생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드물다. 몇 살에 들어가서 어떤 과정을 거쳐 몇 살에 졸업했을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아카드어 쐐기문자를 습득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카드어 쐐기문자는 매우 까다로운 편이다. 글자의 수도 많고, 음절 등의 수도 불규칙하고, 음절을 조합하여 문장을 엮는 일 등이 매우 어려운 편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상당한 기간을 집중적으로 교육에 투자해야만 능숙한 서기관으로 육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어려운 문자는 현대인들이 배우기도 쉽지 않다. 필자는 아카드어 문헌에 숙달한 동료 학자들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다.
4. 다양한 직업과 역할
현대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최고 교육 과정에 입학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긴 교육 과정을 모두 마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집안이나 신분 등의 제약도 있었고 본인의 능력도 중요한 요소였다. 고대 이집트처럼,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교육 과정을 모두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한 학생들은 다양한 곳에 일자리를 잡았다.
문맹이 일반적이던 시대였다. 어느정도라도 글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서기관은 힘을 지닌 집단이었다. 그들은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과학, 문학, 종교 등 그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했다.
큰 가문이나 상인들에게 고용된 서기관이 숫적으로는 가장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사적으로 고용되어 보수를 받았을 것이다. 대개 고용된 곳의 재산과 관련된 사항을 기록하고 관리해 주었다.
이런 ‘상인의 서기관’들은 단순히 상업의 보조적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문명을 퍼뜨리는 역할도 했다. 기원전 1700년경까지 아나톨리아 반도는 아시리아의 상업 식민지였다. 당시 아나톨리아는 작은 도시국가로 나뉘어 경쟁하고 있었고, 문명이 발달한 아시리아 상인들이 이 지역에서 큰 이익을 내었다. 당시 아나톨리아에는 글이 없었던 것 같다.
고대 히타이트어는 인도유럽어 계통의 말이고, 고대 아시리아인들은 셈어인 아카드어를 썼다. 이렇게 어족이 크게 차이나지만, 고대 히타이트인들은 아카드어 쐐기문자를 빌려 자신들의 말을 적었다. 아마도 아시리아와 교역하며, 아카드어 문자가 아나톨리아 반도에 자연스레 퍼져나갔을 것이다. 이 과정에 아시리아 상인에게 고용된 서기관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아카드어 ‘토판의 집’은 히타이트어로도 ‘학교’라는 뜻이다.
큰 돈을 모은 된 서기관도 있었다. 신바빌로니아 시대 ‘잇티-마르둑-발라투’(Itti-Marduk-balatu)라는 서기관은 바빌로니아와 보르시파에 노예 100명을 거느리고 집 60채를 소유했음을 자랑하며 감사를 드린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이름 ‘잇티-마르둑-발라투’는 “마르둑과 함께 생명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에서 마르둑 신앙을 확인할 수 있다.
5. 유명한 서기관들
길고도 어려운 교육 과정을 모두 끝낸 사람은 궁전 서기관이나 신전 서기관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고위직으로 진출한 이들은 고급 정보를 다루었다. 그들은 도서관을 관리하거나 이따금 외교문서도 작성했다. 신아시리아의 사르곤과 센나헤립 시대 나부-주쿱-케누(Nabu-Zuqup-Kenu)라는 서기관은 여러 도시를 다니며 토판을 전문적으로 수집하여 도서관을 만든 것 같다. 그는 아마도 ‘개인적 관심’으로 토판을 수집하고 스스로 복사해서 챙겨두었던 듯 하다.
5.1. 에상길-킨-아플리
<바빌론 신정론(神正論)>이라는 아카드어 문헌이 있다. 구약성경의 <욥기>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서, 욥기에 관심있는 분께 반드시 추천하고 싶은 문헌이다.
<바빌론 신정론>은 구약학자들에게 일찍이 큰 주목을 받았다. <욥기>를 쏙 빼어 닮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근본적인 회의에 빠진 나머지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면서 시작하는 서두는 물론이고, 주인공과 친구들이 주고 받으며 논쟁을 이끌어 가는 형식도 <욥기>와 같다. 주제는 더욱 밀접하다. 주인공은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를 고발하고, 신들이 창조한 이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실랄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친구들은 주인공을 이해하지도 동조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바빌론 신정론>의 주인공은 <욥기>와 달리 육체적인 질병을 앓거나 불운에 빠진 사람이 아니었다. <욥기>도 첫 두장과 마지막 장을 빼면 그런 말이 거의 없다. 주인공은 그냥 평범한 인간이다. 신정론은 보통 사람이 물어도 되는 질문이다. 신정론은 반드시 유일신교를 전제하지도 않는다. 주인공은 마르둑 종교가 옳고 유효하다는 친구들에 맞서, 그 믿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구약성경의 <욥기>에서는 하느님이 등장하여 인간의 논쟁을 정리하신다. 그러나 <바빌론 신정론>은 인간의 말로 끝난다. 폰 조덴은 이 논쟁의 승자는 없다고 설명한다.
첫 글에도 언급한 고대 근동학의 아버지 폰 조덴은 <바빌론 신정론>의 주인공을 ‘인내자’(Dulder)로 옮겼다(TUAT). 이 말은 ‘견디는 자’, ‘감수하는 자’ 등의 뉘앙스를 지녔다. 신들이 빚은 세상의 다양한 부조리를 목도하면서도, 쉽게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창조계가 부조리함을 얼핏 발견하고 믿음을 섣불리 내치지 않는다. 오히려 인내자는 창조계과 신들과 스스로를 끈기있게 성찰하며, 차근차근 묻고 따진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더 깊은 성찰로 인도된다.
놀랍게도 이 신정론은 저자가 알려져 있다. 에사길-킨-아플리(Esagil-kin-apli)는 기원전 11세기 바빌론의 ‘움마누’인데, <바빌론 신정론>의 저자로 알려진 서기관이다. 그는 이 문헌에 자신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해서, 마치 암호처럼 운율을 맞춰 놓았다. 그런데 이 암호에 쓰인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상길-키남-웁빕’(Sangil-kinam-ubbib)이다. 일종의 필명으로 보이는 이 이름에 쓰인 ‘상길’(Sangil)은 바빌론에 존재했던 마르둑 신전 에상길라(Esanglia)의 줄임말이었다. 아마도 그는 마르둑 신학자였을 것이다.
그는 이 <바빌론 신정론>의 저자였을까? 대부분의 고대 문헌처럼 이 작품도 더 오래된 전승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암호처럼 새겨 넣은 것으로 봐서, 그는 이 작품에 자신의 성찰을 상당히 삽입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그를 저자(author)로 부를 수도 있을까.
구약성경의 <욥기>는 그리스도교의 경계를 넘어 사랑받는 책이다. 욥기에 관심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 <바빌론 신정론>을 보아야 한다. 하지만 국내 그리스도교 신학계는 이런데 관심이 너무도 적은 것 같아 안타깝다.
에사길-킨-아플리는 위키피디아에 올라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래에 언급할 신-레키-운닌니와 함께, 위키피디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식인의 반열에 속할 것이다. 이 움마누의 생애, 다른 작품, 선임자 등에 대해 더 자세히 공부하고 싶은 분들은 아래 영어와 독일어 위키부터 시작하시면 될 것이다.
http://en.wikipedia.org/wiki/Esagil-kin-apli
http://de.wikipedia.org/wiki/Esa%C4%9Dil-k%C4%ABn-apli
5.2. 신-레키-운닌니
하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대표적인 서기관이라면 기원전 1200년경의 ‘신-레키-운닌니’(S?n-l?qi-unninni)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신(=달신)은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전통적인 달신 숭배의 전통을 반영하는 이름이다(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달신숭배가 지닌 영향력은 졸저 『구약성경과 신들 - 고대 근동 신화와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2012 한님성서연구소) 2장을 참조하라).
그는 아카드어로 <길가메쉬 서사시>를 기록한 서기관이다. 그는 고대 수메르어 사본에 기반하여 기원전 1200년경 <길가메쉬 서사시>를 12개의 토판에 기록했다. 그가 12개의 토판에 기록한 <길가메쉬 서사시>는 일종의 표준판처럼 통용되었던 듯 하다. 그가 남긴 토판을 따라 연습한 듯한 유물이 고대 근동의 도처에서 비교적 쉽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의 이름이 드높았기 때문에 후대에 그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서기관이 꽤 많았다. 그만큼 그는 영향력이 강한 대서기관이었다.
신-레키-운닌니도 역시 위키피디아에 이름을 올려 후대의 지식인들과 여전히 경쟁하고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Sin-liqe-unninni
6. 여성 서기관
글을 쓰고 유통하는 일에 여성은 일찌감치 참여하였다. 이미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여성 서기관이 존재했다. 여성 서기관도 남성 서기관처럼 출신 배경이 좋았고, 일부는 이름이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인물은 ‘엔헤두안나’(En-hedu-anna)인데, 우르의 여성 사제이기도 했던 이 여성은 사르곤 대왕의 딸이었다. 이 분도 역시 위키에 이름이 올라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Enheduanna
http://de.wikipedia.org/wiki/En-hedu-anna
7. 마치며
수메르어를 보며 한글을 생각한다. 아마도 인류 최초의 언어 가운데 하나였을 고대 수메르어는 기원전 17세기 이후 구어로서 역할을 했고, 그 이후 1천년 이상 학문과 종교의 언어로서 영향력을 유지하였지만 결국 잊혀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근대 이후 부활하여 소수의 고대 근동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이해되고 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고대 수메르어가 지닌 내용과 의미 때문일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콘텐츠’의 힘이다. 다시말해, 쉬운 우리말에 깊은 의미를 담는 일이야 말로 글을 살리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