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불편한 세상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배선영 | editor@catholicnews.co.kr
ⓒ배선영
회의(會議)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 회의 자료가 없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당황했다. 나는 회의 자료가 왜 필요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회의 내용이 잘 공유되는 것이 중요하지 그것이 문서를 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의 자료를 준비하지 않는 것이 ‘성의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 것, 아니 회의에 누군가의 성의가 필요하다는 것에 의아했다.
그 후 ‘성의가 없다’는 말이 마음속에 계속 남았다. 그 말은 내가 다시 직장을 다니는 것을 선택하는 데에 망설임과 두려움을 갖게 하는 상징적인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다시 직장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앞의 회의처럼 납득이 안 되는 상황들이, 힘든 직장생활을 더 어렵게 만들고는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쥐꼬리도 안 되는 월급을 주면서 늘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었다. 돈을 준다는 이유로 일하는 사람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별 불만 없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야근 수당을 줄 것도 아니면서 출퇴근 시간에 민감하게 구는 고용주도 있었다. 출근 시간을 감시하는 기계 시스템을 도입하면 나는 꾀를 내서 늦고는 했다.
사명감과 애사심으로 똘똘 뭉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올려준다는 월급도 마다하는 착한 사람들 때문에 월급이 오르길 원하는 사람은 돈이나 밝히는 속물처럼 여겨지는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다 함께 의사 결정을 한다면서 정작 그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의 편의는 배려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모두가 같은 크기의 결정권을 가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같은 공동체 안에 있더라도 사람마다 덜 중요한 일이 있고, 더 중요한 일이 있게 마련인데 매번 나와 상관도 없는 일에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담당자가 직접 결정하면 좋겠다고 속으로만 답답해 했었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기획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표의 말이기 때문에 지지하고 실행해줘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업무에 대한 의욕이 사라졌다. 기한 내에 일을 못 끝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닦달할 때는 ‘세상에 반드시 꼭 그 시간에 끝내야 하는 일이란 게 어디에 있나, 사람이 정하기 나름이지’ 하는 반감이 들었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시간 내에 일을 끝냈다.
회의 때마다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본인에 대한 성찰은 없고, 나에게 부정적이라는 평가를 했을 때는 절망적이었다. 잘 웃지 않는 것은 내 단점이 되었고, 잘 웃고 밝고 긍정적인 동료는 좋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내 관점에서 보자면, 항상 웃는 얼굴인 것이 오히려 미친 쪽이었다.
직원들을 교육한답시고 앉혀놓고는 자신의 살아온 인생에 대해 늘어놓는 사장에 대해서는 속으로 코웃음만 치는 게 다였다. 야근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 싫었고, 개인의 삶보다 일이 항상 우선시되는 사내 분위기가 짜증났다.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내 친구가 되어버린 것인지,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늘 함께 있다.
본당 신부님은 강론 때마다 교회 활동을 강조하시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하시는데,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 왜 잘못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신부님은 하고 싶어서 신부를 하는 게 아닌가?
미사에 샌들이나 민소매를 입고 오면 안 된다고 할 때는 이유도 함께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연애에 대한 피정 프로그램에서는, 아무리 이 피정에 성소수자가 참여할 리 없다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남녀의 차이’에 초점을 맞춰 황당했다.
친한 친구들을 만났을 때다. 보톡스가 대화 주제로 오르며 급기야 나에게도 꼭 맞으라고 권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랐다. 애인에게 고가의 명품 가방을 선물로 받은 친구에게 다른 친구가 “그 남자는 정말로 너를 사랑하나보다”라고 했을 때, “명품 가방을 사주면 사랑하는 거야?”라고 반문하는 것 외에는 내 마음을 드러낼 길이 없었다. 힘든 가정사를 보여주면 “우리 집보다 심하구나”라고 말하는 친구에게는 내 힘든 사정이 너한테는 위안이 되어서 좋은지 묻고 싶었지만 친구가 민망해 할까봐 참았다.
공동체에서, 옳고 그름이나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어떤 일을 선택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또 내가 이상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나는 선택에 있어서 즐거움이나 내가 얼마나 원하는가가 중요하다. 정의감이나 도덕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그런 비난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내가 뿌리내리고 살만한 곳이 없다. 모나고 예민한 탓일 수도 있고, 멍청해서 이런 불편함을 되짚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외톨이가 아닌 것을 보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잘 찾아낸 모양이다. 그러나 어디에 가나 불편함은 있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만을 찾아서 살다가는 결국엔 혼자가 될 것임을 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편안함이 아니라 나의 불편함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지난 곳들을 떠난 이유는 불편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표현했을 때 다가올 갈등이나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두려웠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수긍하는 척만 하고는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고, 쉽게 지쳐버리고는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설득시키기 위해 혼자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묻고, 대화하고 싶다. 세상의 모든 상황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내가 직접 관여하고 행동해야 할 상황에서는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에 대해 드러내기를 선택하고 싶다.
솔직해지면, 불편한 세상이 더 불편해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온전히 ‘나’로 살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나를 드러내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나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고 싶다.
이 글이 공개되면 주변에 아무도 안 남을 것 같아서 두렵다. 용기를 내서 나를 드러내고 불편함을 표현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받길 바란다.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사람들은 언제든 와서 말해주길….
배선영 (다리아)
대책 없지만,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살고 있는 백수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