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주의’ ‘물질주의’ 극복해야 안녕할 수있다”
[복음과상황 279호 커버스토리_인터뷰]
갈릴리교회 인명진 담임목사 인터뷰
2014년 01월 24일 (금) 이범진 poemgene@goscon.co.kr
최근 갈릴리교회 인명진 목사(68)는 대담집 《삼우지삼로》(三愚之三路)를 펴냈다. 책 제목이 좀 어려운데, 세 가지 바보의 세 갈래 길이라는 뜻이다. ‘삼우’는 영등포산업선교회에 몸담은 일, 호주에서 돌아와 목회한 일, 정치에 뛰어들지 않고 계속 목회를 한 일. 이 세 가지 ‘어리석음’을 뜻한다. 은퇴를 앞둔 그를 위해 지인들이 지어준 별호라 했다. 세 가지 바보 같은 선택이 그를 인권의 길, 목회의 길, 정치개혁의 길로 이끌었다 하여 ‘삼로’를 덧붙였다. 세 길, 갈래마다 그의 치열한 고민들이 선명하다. 고비의 굽이마다 이 땅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앞장섰던 흔적도 역력하다.
지난 1월 7일, 여러 길을 걸어 본 원로에게 이 시대를 샬롬으로 이끄는 방법을 묻고자 갈릴리교회를 찾았다. 처음엔 “할 말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던 인 목사는 두 시간 넘게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냈다. 시종일관 “교회가 답”이라고 주장한 그는, 수십 년 인생 실험의 결론이라며 그 확고함에서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였다.
안녕들 하시냐는 인사가 유행이다. 목사님은 그동안 안녕하셨는지?
나는 뭐 아주 잘 지냈다. 지금 안식년 기간이다. 어제도 식구들하고 놀았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은퇴를 앞두고 계시다 들었다. 심경이 어떠신가?
사실상 지금도 은퇴라고 봐야 한다. 교회를 나오지 않으니까. 은퇴식은 올 하반기에 할 예정이다. 오늘은 인터뷰 때문에 교회에 왔다. 교회 안 나가도 되니까 편하고 좋다. 그런데 한편으론 은퇴 후 어느 교회를 다닐지 걱정이다. 여기저기 다녀 보다가 갈 데 없으면 천주교로 갈까 하는 생각도 한다.(웃음) 내가 직접 겪게 되니까 은퇴한 목사가 편히 다닐 교회가 없다는 게 심각한 문제라는 걸 알았다.
교회가 이렇게나 많은데 다닐 교회가 없나?
교회가 무엇인가? 공통의 신앙고백을 하는 공동체 아닌가? 개신교의 장점은 교단, 교파, 개교회에 따라 다양한 신앙고백이 있다는 것인데, 지금 한국에 있는 교회들은 너무 다 똑같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갈릴리교회만의 신앙고백은 무엇인가?
우리는 매년 1월 첫 주일에 계약 예배를 드린다. 계약의 내용은 첫째가 물질주의 반대, 둘째가 가족주의 반대이다. 이런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교인이다. 1년에 한 번씩 이런 공동체 계약을 맺는 것으로 교적부 등록을 대신한다. 지금껏 목회하면서 교적부를 만들었거나 본 적이 없다.
‘물질주의 반대’ ‘가족주의 반대’가 갈릴리교회만의 특별하거나 고유한 고백은 아닌 듯하다.
우리 교회는 딱 이 두 가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물질주의는 하나님 제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게 세상 물질이라면 우상이다. 자식이나 남편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게 우상이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내야지, 사람에 집착하거나, 아내 남편 등 가족들의 안녕만을 추구하는 것도 신앙이 아니다. 다 내려놓고, 하나님만 섬겨야 노예였던 우리가 자유로워진다. 이것들을 극복해야, 개인이든 사회든 안녕할 수 있다.
‘가족주의 반대’에 대해 더 설명해주신다면?
쉽게 말해 가족 이기주의를 타파하자는 거다. 요즘 우리 기독교가 피해야 할 것이 가정 사역이다. 예수님은 한 번도 식구들끼리만 잘 먹고 잘살라 하신 적 없다. 예수님의 가족이란 이웃이었지 혈육이 아니었다. 가정 사역을 열심히 하다 보면 가족의 범위가 축소되고 만다.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이 다 가족이 되어야 하는데, 평생 나와 가족이 어떻게 먹고살까만 고민하며 안식하지 못한다. 예수님 믿으면서도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진리에 접근조차 못하고 있는 꼴이다. 배고픈 이웃이 곧 ‘자기 몸’이어야 하는데, 가족들 챙기느라 바빠 ‘기독교인’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기독교 안에서 진행되는 가정 사역들은 ‘유사 복음’으로 여기고 배격해야 마땅하다.
예배 중 사죄의 기도 시간에 ‘구체적인 죄목’을 불러준다고 알고 있다.
우상을 섬긴 죄다. 내가 너무 먹어서, 너무 가져서 남들이 못 먹고 못 가진다는 죄를 주로 말한다. 내 자식 챙기느라 남의 자식 나 몰라라 한 죄 등 조목조목 말해준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당연히 근본적인 회개도 불가능하다. 돈 많이 버는 걸 하나님 축복으로 아는 ‘바알 신앙인’들이 너무 많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매주 고백하면서, 정작 ‘무슨 죄이기에 죽기까지 할 죄냐?’고 물어보면 막상 답을 못한다. 기껏해야 음란한 마음 품었다 정도다. 내가 대신 대답해주자면, 죽을죄는 물질주의에 빠지는 게 죽을죄다. 물질주의는 내가 물질을 많이 가져서, 내가 삶의 주인이 되려는 거다. 돈으로 하나님 자리를 빼앗아 내가 내 삶의 주권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역적질이다. 쿠데타이다. 죽을죄는 곧 돈을 좇는 삶이다.
가족의 경제적 안녕이 위협당하는 상황이라면 ‘물질주의를 극복하라’는 말은 버겁게 들릴 것 같다. 지금껏 걸어오신 길을 비춰봤을 때 목사님도 그런 존재론적 위협을 겪으신 것 아닌가.
정말 먹고살 것이 없어서 불안한 건지 혹은 남보다 더 잘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불안한 건지 묻고 싶다. 대다수는 두 번째이지 않을까 싶다. 뭐, 산 목구멍에 거미줄 칠까. 우리나라는 굶어 죽으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사회다. 난 우리 교회 청년들을 만나면 과감하게 경쟁 트랙에서 탈출하라고 말한다. 내가 젊었을 땐 뭐 먹고 사느냐는 걱정은 안 한 것 같다. 아니, 고민을 많이 한 것도 같은데 그것 때문에 삶의 방향을 바꾸진 않았다. 처음에 신학교 졸업하고 공장에 갔는데, 일용직 노동자 월급으로 아내랑 먹고살 수 있을까 고민했다. 집이 얼마나 좁았는지 잘 때 다리를 쭉 뻗으려면 문밖으로 발이 삐쳐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미련했다. 대책 없이 애도 낳았다. 유치원이나 학원은 당연히 못 보냈다. 그럼에도 나에겐 공장 노동자로 살아야 하는 삶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다시 교회 이야기로 돌아가서 물질주의, 가족주의와 싸운 결과를 듣고 싶다. 개인이나 교회 차원의 변화가 안녕하지 못한 사회에 샬롬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우리 교회는 ‘수입의 십일조’와 ‘지출의 십일조’를 한다. 지출의 십일조는, 일상의 지출에 있어서도 신앙과 직접 연관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가령, 예수님께서 오늘 이 땅에 오시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밥 먹지 않겠나. 우리도 매일의 일상적 지출에서 그것을 실천해보자는 취지다. 우리 주변에 굶는 이가 많은데 이들에게 밥을 주거나 돈을 쓰자는 의미다. 매일의 일상, 매끼를 가난한 사람들, 즉 예수님과 함께하자는 의미다. 교인들 경조사 때 교인들 모아 음식 대접이나 이런 거 하지 않는다. 그런 잔치할 돈으로 베트남에 송아지 보낸다. 베트남 전쟁 때 우리나라 군인들이 참전을 가장 많이 했다고 하더라. 이에 따른 우리의 책임이 크다. 남의 나라 가서 가정을 파탄 낸 책임을 져야 한다. 그곳의 전쟁고아, 미망인, 부상자들에게 송아지를 주는 카우뱅크 사업이다. 매년 50마리씩 보낸다. 함께 잔치를 열자는 의미다. 에너지 부족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책임을 지고 있다. 교인들에게 ‘이산화탄소 헌금’을 받는다. 그 돈으로 매년 사막에 나무 2천 그루씩 심는다.
이주노동자들 800명에게 세례를 준 이야기도 유명하다.
20년 동안 800명 세례를 줬다. 시작은 매주 600~800명씩 노동자들이 오는데 닭튀김을 주는 것이었다. 교인이 500명인데 당연히 재정이 감당이 안 되었다. 교회운영비도 안 나오는데 닭튀김 값 마련하느라 다른 교회로 내가 ‘앵벌이’(특강 및 설교)도 많이 다녔다. 결국 교인들이 이 사업을 접자고 하더라. 그래서 기도했다. 원칙대로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밀고 나갔다. 그때 세례받은 이주노동자 중 14명이 목사가 되었다. 도쿄, 인도네시아, 호주, 몽골 등 자기 나라에 돌아가 교회를 세워 목회를 한다. 인도네시아에선 여기 출신들끼리 4월 27일에 교단을 만든다더라. 교단 이름이 ‘갈릴리’다.(웃음) 선교 역사에서 이렇게 작은 교회가 해외에 하나의 교단을 세운 사례가 있을까? 없을 것 같다. 우리 교회가 1년 예산의 50퍼센트(약 5억 원)를 사회선교에 쓰는 원칙을 세웠다. 공동체 계약 내용에도 있다. 이런 원칙들도 배워서 자기네 나라의 교회에 적용한단다. 이런 교회들이 곳곳에 많아지면, 개인도 안녕하고 사회도 안녕해지지 않겠나.
▲ ⓒ복음과상황 오지은
물질주의 극복, 개인과 교회 차원에서 가능할까? 이미 우리는 고도의 물질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교회가 사회의 안녕을 위해 제도와 구조의 모순을 바꾸는 데 나서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하면서 고민을 참 많이 했다.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다 보니, 구조악(構造惡)을 개선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난이라는 것, 물질주의라는 것은 구조가 바뀌기 전에는 극복할 수 없다는 생각도 했다.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려고 13년 동안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노력했고, 실제로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다. 그런데 돌아보니까, 아니었다. 제도가 많이 바뀌어서 좋은 세상이 올 줄 알았는데, 10여 년 일하고 나서는 회의감이 들었다. 인간의 욕심은 노동자나 기업주나 똑같구나, 하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많이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분배하는 일을 했는데, 노동자들은 자기 것을 자기보다 못한 이들에게 분배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 신경이라도 쓰나? 안 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딛고 그 위치까지 갔으면서, 정작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핍박당할 때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 질려버렸다. 그들이야말로 타인의 생명을 위해서 함께 파업했어야 했다. 노동조합은 조직력 없는 그런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위해 싸웠어야 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제도가 바뀌어서 잘 되는 게 아니구나, 사람이 먼저구나,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구나….
젊은 시절에는 혁명가로서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래서 시작한 게 목회다. 우리 교회가 하는 일들이, 내용만 보면 산업선교회가 하던 것 그대로다. 그때는 체제를 바꾸려 했다면, 이제는 사람에 포커스를 두었다는 점만 다르다. 궁극적으로 제도도 바뀌어야겠지만, 사람이 동력이 되어야 한다. 우리 같은 교회가 많아지면, 세상에 진정한 샬롬이 더 많아지지 않겠나. 무슨 대단한 운동가들이 아닌, 평범한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해도 역사가 이루어짐을 목회를 통해서 확신했다.
구조악이 심각해도 너무 심각한 것 같다.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는 어떻게 생각하나? (재벌 중에서도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이 국내 기업 전체 영업이익의 22.4퍼센트를 차지했다. 2012년 기준으로, 2008년의 두 배에 해당한다.) 사회의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 패턴이 재벌 중심 운영으로 시작되어 그렇다. 이것을 지금 때려잡는다는 것은 경제체제 자체를 혁명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본다. 어렵다고 이대로 두면 우리나라는 양극화 때문에 곧 망한다. 가장 심각한 갈등이 계층 간의 갈등이다. 양극화는 혁명적 폭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는 갈등들의 뿌리는 대부분 계층 간 양극화인 경우가 많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이 쳇바퀴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양극화의 결과가 자살로 나타나고, 저출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살하는 사람의 숫자를 1년 기준으로 통계 내보면 전쟁이 발발했을 때의 피해자 수와 버금간다. 총성만 울리지 않을 뿐, 사람이 죽는 걸로만 보면 우리 사회는 이미 비극적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정도로 현실이 심각하다면, 이런 안녕치 못한 상황이 계속될 경우 어느 순간 혁명적 폭발이 일어나지 않을까.
구조적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나 같은 사람은 얄미운 존재다. 빨리 사람들을 들끓게 해서 폭발시켜야 하는데, 배고픈 사람을 도와서 혁명의 힘을 빼놓지 않나. 자칫 낭만적으로만 보이는 그런 김빠지는 일, 그저 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적당하게 관리하면서 안전핀 역할만 하는 우리 같은 교회를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되묻고 싶다. 과연 혁명적 방법으로 우리는 행복해질까? 결국은 또 불행해지는 사람이 나온다. 그 과정에서 더 큰 피해가 있을 수 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서로 사람 대접 하면서 사는 게 중요한 거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돈이 많든 적든 행복해야 한다. 꼭 물질적인 평등을 이루는 것이 행복의 길로 이어지진 않는다.
결국 예수님의 방법밖에 없다. 나는 두 가지를 다 경험해본 입장에서 이 방법밖에 없다고 본다. 법안을 만들고 제도를 개선해서 사회를 개혁해나가는 방법으로는 안녕하지 못한 문제가 결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그것보다는 굶는 이웃 할머니에게 밥을 드리고, 노숙인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게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정치하자는 요청이 들어와도 안 한다. 누가 정치를 해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회로는 해결이 가능하다. 27년 실험의 결과이기에 나는 이 부분에서 확신하고 있다. 이걸 알아야 한다. 복음은 사회 개혁적 교육이나 의식보다 더 혁명적이라는 사실을. 개인이 신앙을 제대로 갖는다면, 그것이 사회를 변혁하는 동력이 된다. 사회 혁명에 가장 효과적인 게 복음이다. 개인적인 목회 ‘실험’의 결과일 뿐이지만, 좋은 선례로 남았으면 한다.
7년 전 복상과의 인터뷰(2007년 1월호)에서 노무현 정부를 비판한 바 있다. ‘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 ‘비뚤어진 반 기업 정서’ 등을 이유로 꼽았고, “준비되지 않은 정권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이렇게 주저앉고 마는가 하는 절망감”을 표현했었다.
노무현 정부가 가장 친삼성적이고 친자유주의적인 경제제도를 도입했다고 본다. 삼성에 가장 먼저 무릎 꿇지 않았나. 이명박, 박근혜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노무현만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지나치면 안 된다. 내가 1987년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변인으로 있을 때 노무현도 집행위원장으로 있었다. 나한테 “선배, 선배” 할 정도로 서로 잘 알고 지냈다. 그 사람의 사상이나 목표는 좋게 생각한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런 사상을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했던 게 문제였다. 나한테도 도움을 요청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그랬다. 우리 사회에 당신 생각을 그대로 적용하려면 수없는 부작용과 저항이 있을 거라고. 더 기다리면서 그 사상을 정책으로 적용할 수 있게 정교한 소프트웨어를 마련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냥 밀어붙이더라. 그러다가 제일 먼저 무릎 꿇었다. 그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 더 정교한 과정이 필요하다.
현 정부는 어떻게 보나?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경제민주화를 이루겠다고 했지만 막상 안 되지 않나. 결국 쉽게 옛날 방식으로 돌아간다. 재벌한테 매달려 몇몇 배부르게 해주고 사람들 고용하라고 한다.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라서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발전 3개년 계획을 이야기하는데, 근원적으로 경제민주화 없는 경제 발전을 한들 국민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열심히 일하면 삶이 개선된다는 신뢰가 생겨야 진짜 경제 발전이다. 경제민주화 없이 안녕한 사회는 불가능하다. 박 대통령 신년 연설을 들었는데, 대통령 후보 때 말하던 ‘사회통합’이나 ‘경제민주화’ 이야기는 들을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속은 거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삼성공화국이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이제 사회 폭동으로 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착하니까 자기 목숨 끊고, 아이 안 낳는 정도로 표출하는 건데…. 위험한 단계까지 왔다.
이처럼 ‘위험한 단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교회가 물질주의에 빠져 재벌과 권력의 편에 서는 게 심각한 문제다. 교회는 열심히 경제민주화의 길을 주장하고 실천해야 한다. 구약의 십일조는 분배가 목적이었다. 교회 헌금에는 응당 가난한 자가 가져가야 할 몫이 있다. 우리 것을 떼어 주는 게 아니고 당연히 줘야 할 몫을 주는 거다. 그런데 반대로, 요즘 교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걷어 교회 건물을 짓는 등 엉뚱한 데 다 써버린다. 한마디로 도적질이다.
최근에 ‘민주와 평화를 위한 국민동행’(국민동행)이라는 정치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어떤 일인가?
정치는 아니고, 구체적으로 개헌운동이다. 변화된 시대 현실에 맞는 개헌을 추진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여러 사람이 권력을 나눠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틀을 만들어야 우리 사회에서 양극화, 이념 갈등, 패싸움이 없어지지 않겠나. 이를 위해 범야권 정치원로와 시민사회 인사들이 모였다.
다시 제도적 개혁을 시도하는 건가?
이제 교회에서 은퇴하니까…. 교회가 시민세력, 정치세력과 함께 최소한의 제도 개혁에 공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작한 마음도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첨예한 이념 갈등이라든지, 편향성을 극복할 수 있는 제도 개혁에 기여하고 싶었다. 지금이 중요한 때다. 국제정세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역사적 선택을 잘못했다가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통일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국민들이 의견을 모아야 하는데, 현재의 정치 구도로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많은 사회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남북분단의 현실 때문에 ‘묻어두고 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안녕한 사회를 위해서는 남북관계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하면서, 핵을 죽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북한에 ‘비핵화’ 조건으로 대화하자는 정부를 보면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북한이 핵을 갖는 게 좋다는 말이 아니다. 현실 안에서 핵을 내려놓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며 대화부터 해야 한다는 뜻이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지금은 또 하나의 역사적 찬스다. 이런 말 하면 또 ‘종북’이라고 할 테지만, 이런 때 대북 인도적 지원부터 빨리 시작해야 한다. 통일에 대한 이야기가 교회에서든, 어디서든 시작되어야 하는데 답답할 뿐이다.
젊은 청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에 자기를 무조건 던지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의 경쟁 구조 안에서 하나님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마라. 인간관계 프로그램 중에 뒷사람이 받아줄거니까 믿고 넘어지라는 훈련이 있지 않나. 넘어져도 다 받아주는데 머뭇거리게 되는 심정, 나도 안다. 그러나 넘어져 보면, 하나님이 있다. 못 맡기고 자꾸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짜다. 믿고 넘어지면 하나님이 있다. 취직이고 뭐고 확 넘어져야 한다. 저 남자 저 여자랑 결혼하면 어떻게 먹고살까, 아이는 어떻게 키울까, 걱정하지 말고 그냥 사랑하면 결혼하라. 물질주의와 개인주의, 출세에 낚이면 인생이 힘들어진다. 중산층, 상류층의 삶을 우상으로 삼지 말기를 바란다.
진행·정리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이 글은 복음과상황(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