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울린 이 사람〕
어머니의 마지막 몇달
2014.02.11 일감 스님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형님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님이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았는데 연세가 높아 수술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노모에게 “제가 사는 암자는 공기도 좋고 꽃도 많으니 잠시 소풍 간다고 생각하고 저를 따라가십시다”며 암자로 모시고 왔다.
암자에서 내 딴엔 어머니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자연요법 치료를 하게 한 것이 알게 모르게 어머니를 힘들게 해드렸다. 절집 반찬이 원래 그렇듯이 대부분 채소 반찬에, 넘기기 힘들어하시는 현미밥만 드렸다. 또 이런저런 민간요법과 운동을 하셔야 한다고 아침낮으로 산책하게 했다. 어머니는 힘든 내색도 않고, 하자는 대로 했다.
*영화 <집으로> 중에서
그러나 어머니로선 아무리 그 절의 주지 스님이 아들이라 해도, 속가 식구가 절집에 얹혀산다는 것은 여간 눈치 보이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절집이라도 살림은 살림인지라 이것저것 눈에 밟히는 것이 좀 많았을까. 어머니는 그 병든 몸을 이끌고 이렇다 저렇다 말씀 없이 채마밭을 일구고, 이곳저곳을 알게 모르게 윤이 나게 쓸고 닦았다. 심지어는 음식 찌꺼기를 가져가는 까치도 어머니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탁발을 해 가곤 했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암자에 사는 다른 식구들의 얼굴들이 전에 없이 밝아졌다. 야단치고 바른말 잘하는 주지보다는 어머님이 법력이 훨씬 높은 셈이었다. 시봉을 하려고 모셨지만 결국 시봉받은 꼴이 되었다.
촛불이 꺼지기 전에 잠깐 동안 더 밝은 빛을 내고 사라지듯이, 어머니도 그러셨다. 아들을 위해서 짧은 몇달 온 힘을 다했다. 당신은 “이만하면 되었어요! 너무 애쓰지 마세요” 하면서도, 아들스님 좋아하라고 애써 기운을 내셨다. 어머니는 스님이 되었어도 아직 공부가 모자라는 아들을 걱정하며 “나는 괜찮으니 일 보라”는 한마디 말씀 남기시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설을 막 지나서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속을 많이 썩여드렸다. 특히 출가할 때는 어머니의 눈물을 많이 뺐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힘든 어머니 앞에서 출가를 선언했다. 나이가 어린 탓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입장보다는 출가를 하고 싶은 내 욕심만 앞세웠다. 출가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어머니 앞에서 ‘세상 이치가 어떻고, 불교가 어떻고…’ 떠들었다. 어머니는 철부지 아들의 고집을 꾸짖지도 못하고 쓰린 가슴으로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나중에야 들었다. 그러면서 이왕지사 출가했으니 큰 발심으로 대도를 성취하기를 기도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아직도 부모의 깊은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