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과 삶] 한풀선사의 신선도
지리산 청학동, 검과 몸이 하나로 스며든다
*한풀선사가 추구하는 신선의 길은 정성을 다하는 정신과 육체의 고된 수련에서 시작된다. 지리산 기슭에서 그가 검무를 선보이고 있다.
지리산 삼신봉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삼성궁 한가운데의 둥근 연무장.
두 자루의 검을 땅에 힘차게 꽂는다. 한 자루는 두개의 검 사이에 놓는다. 천지의 기운을 모으는 깊은 호흡을 한 그(한풀선사)가 땅에 놓인 검을 천천히 집어든다. 칼집에서 검을 꺼내 하늘을 향해 치켜들더니 서서히 검무를 추기 시작한다. 강한 기를 칼끝에 품고, 사방을 향해 휘두른다. 때로는 먹잇감을 눈앞에 둔 호랑이처럼 신중하기도 하고, 때로는 날카로운 매의 직선 활강처럼 빠르게, 때로는 신선의 여유로움과 부드러움으로…. 검과 몸은 하나가 되어 자연에 스며든다. 땅에 꽂았던 두개의 검도 차례로 집어들어 대지를 박차고 허공을 가른다. 그가 6살 때부터 익힌 신선도의 검법 가운데 하나인 심상검법이다. 심상(心像)검법은 일정한 형식이 없이 마음이 가는 대로 검을 쓴다. 초보 검법인 아시검법과 중간 단계인 아린검법,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아리랑검법을 익힌 절정의 고수들만이 할 수 있다.
삼성궁은 한풀선사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삼성(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성전이다. 그가 50년 전부터 일궈온 이곳 청학동은 숨겨진 땅이었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은 한반도를 흘러 남쪽으로 내려와 지리산에서 마무리된다. 해발 800m의 청학동은 푸른 학이 날아다녀 예로부터 도인촌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도선국사 등 이름난 선인들이 도를 닦기 좋은 명승지로 꼽은 땅이다.
이곳에 사는 한풀선사와 그를 따르는 도반 30여명은 새벽 3시 반에 스물한번 울리는 징 소리와 함께 잠을 깬다. 해가 뜨기 전의 고요함 속에서 경을 외우고 토굴에 들어가 삼법 수행에 들어간다. 삼법 수행은 우주의 숨결을 익히는 기 수련인 조식(調息), 의식을 통일해 번뇌망상을 줄이는 지감(止感), 집착을 없애는 금촉(禁觸)의 수행이다. 삼법 수행을 마치면 해맞이 경배를 한다. 천부경 등을 독경하고 계율을 서약한다. 선식으로 아침을 먹은 도반들은 몸으로 하는 권법 ‘체술’과 활쏘기, 검법을 익힌다. 선무(仙舞)라 불리는 춤과 민요와 창도 배운다. 옛 화랑의 풍류를 익히는 것이다.
오후에는 정자나 바위에 앉아 명상에 들어간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돌을 쌓아 솟대를 만든다. 저녁에는 법문과 경전을 공부하고 다시 삼법 수행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삼성궁
한풀선사와 30여 도반들이
토굴에 들어가 삼법 수행하고
바위에 앉아 자연과 호흡하며 명상
단전에 모든 의식 집중해서
‘나’라는 존재를 잊어야
기가 스스로 제 길을 찾아가
속세명 강민주인 그는 청학동에서 오래전부터 이어온 신선도 교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선도의 한 종파인 ‘동도교’ 창시자인 할아버지 강한수 옹과 아버지 동원선사 슬하에서 자라며, 6살 때부터 낙천선사로부터 신선도의 경전을 배웠다. 낙천선사(1902~1984)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황해도 구월산에 있던 삼성사가 일제의 탄압으로 소실되자 그곳에 있던 삼성의 위패를 이곳에 모시고 와서 후학을 키웠다고 한다. 그리고 제자인 한풀에게 “너는 앞으로 민족혼을 샘솟게 하는 우물을 파라. 목마른 자들이 샘을 찾듯이 뿌리를 잃은 수많은 자들이 쉬어서 목을 축이게 하라”는 유지를 주었다고 한다. 1984년부터 그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청학동에 삼성궁을 짓기 시작했다. 화전민들이 버리고 떠난 산기슭에 돌을 쌓았다. 스스로 돌을 쌓는 법을 터득해 솟대를 쌓았다.
1987년 늦가을 그는 토굴에 들어가 삼칠일(21일) 단식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 자신을 열지 못하면 다시는 햇빛을 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그는 단식을 한차례 연장했다. 몸은 짓물러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오장육부는 말라비틀어져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고행을 거치고도 ‘공부’는 진전이 없었다. 절망감에 빠진 그는 다시 삼칠일 단식에 들어갔다. 깨닫고 싶은 마음도 버리고, ‘나’ ‘우주’ 같은 세상의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애써 놓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한순간 때 묻은 허물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새벽 봉황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텅 빈 마음의 노래를 부르며 토굴에서 나왔다고 한다.
한풀선사는 서울로 올라와 검정고시로 고교에 진학하고 중앙대에서 고고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를 만나 홍익인간 이념을 배웠고, 김성훈 교수로부터 실물경제와 응용경제를 배우기도 했다.
군 복무까지 마친 그가 다시 삼성궁에 내려가 1000개가 넘는, 돌로 쌓은 솟대를 만든 이유는 고대의 소도를 복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소도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지로, 그 앞에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워 제사를 올리던 곳이었다. 또 죄인이 이곳으로 달아나더라도 잡아가지 못하게 한 치외법권 지역이기도 했다.
그는 개인이 배달민족의 시조를 모시는 현실을 걱정했다. 그는 “일본은 시조신을 모신 ‘이세신궁’이 있고, 중국도 시조 ‘황제 헌원’을 모신 관묘가 있고, 북한은 단군릉과 단군 관련 유적 30여종이 있다”고 말한다.
길게 자란 수염이 날리는 그의 나이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64살이라는 한 제자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비록 나보다 나이가 어리시지만 스승으로 오래전부터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의 나이를 짐작해 본다. 붉은 혈색과 그와 악수할 때 느껴지는 뜨겁기까지 한 체온과 강인함은 바로 ‘단전호흡’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단전에 모든 의식을 집중해야 합니다. 숨을 가늘고 길게, 그리고 끊기지 않게 쉽니다. ‘나’라는 존재도 잊어야 합니다. 인위적으로 하려면 흐름이 막힙니다.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면 기가 스스로 제 길을 찾아갑니다. 그 단계를 넘어서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생각을 놓기가 어렵지만 노력하면 쉬운 일이 됩니다.”
하동/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