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남 교수의 아하!
군자의 신앙, 소인배의 신앙
공자님은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의(義)를 위해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이(利)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란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인가 아닌가를 살펴서 해야 할 일이라면 결과와 상관없이 그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다. 한편 이를 위해 사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이해관계를 따지고 손익계산을 해보고 이익이 된다고 하면 행하고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행하지 않는 사람이다. 공자님 자신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옳은 일이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하려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공자님은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고 하여,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을 소인(小人)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군자’란 인간이 지닌 잠재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진정으로 인간다워진 인간, 유교적 용어로, 인(仁)의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소인’이란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한 미성숙한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현지인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산 故 이태석 신부. 한겨레 자료사진
요즘은 개인의 안녕이나 성숙도를 저울질할 때, 신체지수(PQ), 지능지수(IQ), 감성지수(EQ)에 덧붙여 영성지수(SQ)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군자란 어느 면에서 영성지수가 높은 사람인 셈이다. 영성지수가 높은 사람은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이해득실과 관계없이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18세기 독일의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의 ‘단언명령’(斷言命令)이 생각난다. 칸트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 그러면 좋은 성적을 얻을 것이다’와 같이 눈앞에 당장 이루어질 결과를 가정한 조건부 명령을 ‘가언명령’(假言命令)이라 하고, 이와 대조적으로 결과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무조건적인 명령을 두고 ‘단언명령’이라 하였다.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 하는 것처럼 보편적 원칙에 입각한 절대적인 명령이다. 공자나 칸트 모두 얄팍한 실리 같은 것에 매달리지 말고 의연히 행동하라, 영어로 “Do for nothing!”(두 포 너싱)의 원리를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사회는 옳음을 추구하는 군자의 사회인가, 혹은 나와 내 집단의 물질적,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소인배의 사회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한 가지 더 물어보아야 할 것이 있다. 지금 우리는 우주의 기본 원리나 생명·평화·화해·공존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군자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내가 살아서도 복을 넘치도록 받아 남 보란 듯 살고, 죽어서도 어디 좋은 데로 가서 영화를 누리겠다는 등 자신의 안녕을 우선시하며 믿는 지극히 이기적인 ‘소인배의 신앙’을 받들고 있는가? 되짚어봐야 할 심각한 문제다.
오강남 ‘경계 너머 아하!’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