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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강신주가 본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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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저마다 주인 돼 개성있는 꽃으로 피어나는 것” 

부처님오신날 특집-철학자 강신주 불교를 말하다 
2013.05.13 법보신문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대학원 시절 중론 읽으며 불교입문 
20년 동안 각종 논서·선어록 읽어 
나가르주나·임제 스님 좋아하고
일체 권위 털어버린 선종에 매료

 
법보강신주1.jpg
 ▲ 강신주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출판가에서 인문학 서적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사람이 새삼 중요해진 것인지, 아니면 사회의 부품으로 전락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고준한 담론과 옛 전통의 권위에 기대 자신을 치장하는 화장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사람을 향해야 하는 인문학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장식물이나, 취직이나 진급을 위한 스펙으로 전락한 감이 없지 않다. 인문학마저 돈벌이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 아프다.

이런 인문학의 이상 열기 속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 철학자 강신주(47). 인문출판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두드러진다. 2011년 출간된 그의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사계절)은 10만부가 넘게 팔렸다. 철학책으로 드문 성공이다. 그는 하루에 2.5개의 강의를 소화하고 지금까지 20권에 가까운 책을 펴냈다. 한 달에 20일을 지방에서 보내고 있다. 대중들은 그를 원하고 그는 그런 대중들을 위해 촌음을 쪼개 치열하게 살고 있다. 그는 대중들에게 인문학으로 들어가는 문이자 지름길이다. 그의 말과 글에는 사람을 향한 따뜻함이 있다. 사람에 대한 사랑, 자유, 주인됨 이것이 그의 철학의 핵심이다. 그는 대중들의 고통을 미사여구로 위로하지 않는다. 본질을 건드려 원인을 직시하게 한다. 스스로 해결점을 찾게 한다. 그래서 인문학의 화장품을 얻으려고 접근했던 대중들도 그의 글을 접하면 인문학의 본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된다.

그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철학자다. 연세대 화학공학과 출신이지만 서울대와 연세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연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장자 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곧 강단을 내려와 강연과 저서를  통해 저자거리에서 대중과 만나고 있다. 그래서 이름 앞에는 대중철학자, 현장철학자, 거리철학자라는 별칭이 따라 붙는다.

그에게 인문학의 정신은 불교와 다르지 않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사람사람이 꽃처럼 피어나야 하는 인문학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그는 대학원 시절 나가르주나의 ‘중론’으로 불교에 입문했다. 이후 각종 논서와 선어록을 읽었다. 그는 선불교를 특히 좋아한다.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주인이 되는 선불교의 정신에서 인문학의 극치를 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불교가 진보적이고 혁명적이라고 말한다.

“부처의 자비라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다. 사랑을 하면 진보적으로 바뀐다. 사랑을 할 방법을 찾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억압하는 구조를 바꾸려고 한다. 만약 중생의 고통이 자본이나 왜곡된 권력구조에서 오는 것이라면 불교는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나서야 한다. 그것이 불교다.”

그는 기질적으로 임제 스님을 닮았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은 직설적이다. 포장하지 않는다. 특히 사람을 억압하는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이론과 실천이 함께 가는 지식인의 삶을 엿보게 한다.

그는 본지에 매주 ‘무문관’을 연재하고 있다. 불교관련 연재로는 처음이다. 과거와 현재, 동서양을 회통하고, 대중의 삶에 비춰 풀어낸 그의 글쓰기는 ‘선문답’같은 선어록을 생활 속 우리 이야기로 조명해 내고 있다. 그는 요즘 불교와의 인연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스님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데 이어 법보신문 연재까지, 불교와의 만남이 갈수록 잦아지고 있다. 특히 ‘임제록’을 대중적으로 풀어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 불교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대학원 석사 과정 때 불교를 처음 접했다. 나가르주나의 중론(中論)’을 읽었다. 충격적이었다. 거대한 산을 마주한 것 같았다. 뭐 이런 게 있지. 이걸 어떻게 넘어야 하나. 재미있기는 한데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반드시 극복해야겠다는 호승심이 일었다. 정신없이 빠져 들었다. 또 다른 세계를 만난 느낌이었다.”


▶ 주로 어떤 종류의 불서를 읽는지.
“논서(論書)들을 좋아한다. 중론을 읽고 바수반두의 유식(有識)을 공부했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도 봤다. 주로 논서를 다양하게 읽었다. 반면에 ‘화엄경’이나 ‘법화경’은 좋아하지 않는다. 불교의 가르침을 문학적으로 잘 풀어낸 것은 좋은데,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그러면서 대충 퉁 치고 넘어가버린다.”


▶ 중론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 난해한 논서를 대중적으로 풀어 쓸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풀어쓰기가 참 어렵다. 논리의 귀결이 ‘공(空)’인데 지금 법보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무문관도 마찬가지다. 결론은 마음의 집착을 없애고 주인공이 되라는 이야기다. 결국 디테일의 문제다. 게송 하나하나의 결론이 같다하더라도 그렇게 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런데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을 보면 두루뭉술하게 설명하고는 결론을 내 버린다. 중론은 꼭 한번 써 볼 생각이다. 그러나 중론은 학술적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 고민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스스로 나가르주나가 돼서 써 볼 생각이다.”


▶ 글쓰기에 뚜렷한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연재 중인 ‘무문관’만 하더라도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철학,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가 항상 빠지지 않는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인문학(人文學)은 사람에 관한 학문이다. 인문학자나 철학자들은 애정을 가지고 대중을 바라본다. 그래서 하나라도 더 들려주고 싶어 한다. 글은 읽으라고 쓰는 것이다. 삶에 도움이 돼야 한다. 글쟁이의 도리다. 글 쓰는 사람이 내용을 확실히 소화하면 같은 내용을 아이에게도 설명할 수 있고 교수들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글을 써야 한다.”


▶ ‘무문관’을 풀어쓸 때 어디에 핵심을 두고 있나.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스스로 부처가 되고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항상 고민한다. 되도록 복합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글에 서양 철학이 들어가고 동양의 사유가 들어가는 것은 서양에 관심 있는 사람, 동양을 중시하는 사람 모두 경청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무문관이 불립문자를 표방하는 선어록이지만 불교의 역사와 중요한 교리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한다.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다. 어찌됐든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사람이 권위에 굴종하고 집착의 노예가 돼서는 안 된다. 사람사람이 꽃처럼 개성 있게 피어나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같지만 다른 부처가 되고 주인이 되는 길. 그것을 알려주고 싶다.”


▶ 서구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불교를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혀 그렇지 않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인도유럽어족의 토대에서 발생했다. 한문보다는 서양언어와 가깝다. 언어가 사유체계를 구성한다. 인도와 서구의 글과 말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오히려 서양철학을 잘 알아야 한다. 동양이 가지고 있는 표현방법, 즉 레토릭(rhetoric, 수사학)은 불교를 설명하기에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언어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기 쉽다. 중국인들이 그렇게 많은 세월을 번역에 매달렸던 것도 이런 고충 때문이다.


▶ 인문학자 입장에서 보는 불교는 어떤가.
“불교를 보면 담론이 언제 만들어졌는지가 결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불교는 현재도 세련돼 보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절대 낡아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불교의 정신이 굉장히 레디칼(급진적)하고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제도나 관념을 유지하려는 것을 보수라고 한다면 불교는 진보적이다. 이성복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멋지지 않은가. 짜장면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제사상에 짜장면을 놓아야 한다. 홍동백서(紅東白西)를 올려서는 안 된다. 아버지를 사랑했다면 짜장면을 올릴 수밖에 없다. 누구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기쁘게 할 방법을 찾아내게 된다. 이미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도 다르지 않다. 중생을 사랑하기에 사랑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진보적이다. 과거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다. 기존의 이념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중심인데 사람을 보지 않는다. 또 사랑을 하게 되면 반드시 행동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그런 점에서 불교는 인문적이다.


▶한국불교는 선의 전통이 강하다. 불교에서 선이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스승을 죽이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도 조사의 가르침도 도움은 되지만 근본적으로 죽여야 한다. 선불교는 철저하게 싯다르타 부처님의 정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나가르주나의 정신이기도 하다. 교종은 지적인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고 오랫동안 공부한 사람이 존중을 받는다. 스펙 싸움이다. 선불교는 이런 고리를 끊어 버렸다. 레비스트로스(1908~2009)는 계급이 나뉜 것은 문자가 생기면서부터라고 말했다. 뛰어난 통찰력이다. 문자가 생기면서 유식과 무식이 나뉘고 지식이 권력이 됐다. 억압된 사회가 등장했다. 선종은 이런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면서 근원적으로 붕괴시켰다. 문자로부터 발생된 억압된 구조를 해체시켜 버린 것이다. 백장 스님은 죽기 전까지 대중들과 평등하게 노동을 했다. 선종이 아니라면 어떻게 큰스님이 노동을 할 수 있겠나. 이런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정신, 이것이 선의 정신이다.”


▶그렇지만 조계종은 옛 선불교의 정신에서 변질됐다는 지적이 있다. 선종을 표방하는 종파일수록 계보를 따지고 전통과 권위를 따짐으로써 어떤 측면에서 교종보다 더 무서운 억압된 구조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 측면이 있다. 교종은 경전을 가지고 따지기라도 하는데 선종은 ‘직접 해봐’ 하면서 설명도 안 해 준다. 어려운 점이 있다. 그래서 지금의 조계종은 로마 가톨릭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권위적이다. 이런 모습은 불교의 정신과는 맞지 않다. 불가피한 점들은 있다. 이런 조직이라도 있으니 스님들을 공부시키고 키워내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결국은 바로잡아야 한다. 되도록 간결한 구조가 돼야 한다. 종단의 이름으로 권세를 누려서는 안 된다. 낮은 곳을 향해야 한다. 자비심을 회복해야 한다. 조계종을 사랑하지 말고 중생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권위구조를 해소할 수 있다.”


▶불교는 종파가 너무 많다. 경전도 많고. 그래서 번잡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교리를 단순화시켜야 한다. 아직도 한문으로 된 경전들을 읽으니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들다.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정한 줄기를 세울 필요가 있다. ‘육조단경’이나 ‘임제록’ 같은 선어록으로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옛날 사람들처럼 ‘구사론’ 몇 년, 또 어떤 경전 몇 년 이렇게 공부할 수는 없다. ‘육조단경’은 쉽고 재미있다. 에피소드도 많고 소설처럼 읽을 수 있다. 수만 권의 경전을 명료하고 간략하게 요약한 선불교의 전통이 잘 담겨 있다. ‘임제록’도 ‘무문관’도 불교의 핵심을 잘 담고 있다. 선어록은 같은 깨달음의 꽃이 어떻게 다양하게 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불교의 핵심을 배우기에 이보다 좋은 경전도 없을 것이다.”
 

“불교는 인문 정신의 극치…사랑하면 주인이 된다”
 

법보강신주2.jpg 
▲그는 “불교가 사회와 소통하는 길은 곧 우리 사회의 고통을 직시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고통의 원인인 불평등하고 억압된 사회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의 고통을 개인의 고통으로 떠밀지 않고, 사람들이 스스로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는 것.
이것이 곧 시대가 요구하는 불교의 역할이라는 설명이다. 

 
불교목적은 스스로 부처되는 것 
참으로 알게 되면 실천하게 돼 
청춘들 아픔은 사회구조적 고통
불교가 사회적 고통해결 나서야 
대중에 대한 측은지심 글 동력 
임제록 편하게 풀어내고 싶어 


▶선종은 불교의 본래 모습에서 벗어난 중국화 된 불교라는 비판이 있다.
“그렇지 않다. 선종의 전설과 관련해서는 허풍이 없진 않다. 그러나 정신만은 싯다르타 부처님의 전통으로 돌아간 것은 분명하다. 초기경전인 ‘법구경’에서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탁마하던 그 전통이 그대로 복원됐다. 선종은 스스로 수행해서 성불하는 것이다. 공유된 언어도 해체해 버려 특정종파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권위가 생길 수 있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붕괴시켜버렸다.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수행의 전통을 복원해 냈다.”


▶지금도 한역경전을 읽고 있다. 제대로 된 우리말 경전은 여전히 부족하다. 불자들이 경전을 읽기가 힘드니까 교학적인 부분이 취약해지고 기복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경전을 반드시 우리말로 번역해야 한다. 처음부터 완성된 번역본이 나올 수는 없다. 기독교 성서만 해도 번역본이 나온 뒤 개선본이 계속 나왔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번역을 해 놓고 계속 개선본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담론도 생기고 점차 세밀해진다.”


▶불교 경전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번역에 공력이 많이 든다. 그런 현실적인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경전이 정말 많다. 불교가 누구나 성불할 수 있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독교 성서는 하나밖에 없다. 통째로 암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유와 자유로움이 없다. 불교는 깨달으면 누구나 경전을 쓸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장 중생의 고통을 덜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이 많으니 그만큼 고통의 종류도 많고 그 고통들을 해결하려니 여러 경전들이 필요했다. 불교는 이토록 자비롭다. 그렇지만 역시 앞서 밝힌 것처럼 초심자들을 위해 경전의 순서를 정할 필요는 있다. 꼭 필요하면서도 근본적인 경전을 우리말로 풀어서 내놓아야 한다. 스님들의 노력이 중요하다. 의타적인 경전들보다는 스스로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는 경전들을 먼저 우리말로 잘 번역해 내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의 정신이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깨달았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나. 앎과 실천은 다르지 않나.
“진짜로 알고 있는 것과 가짜로 알고 있는 것은 다르다. 진짜로 알게 되면 실천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난로가 뜨겁다는 것을 안다면 절대 만지지 않는다. 데일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제대로 알면 앎과 삶이 함께 가는 것이다. 이것을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말했다. 돈오가 참다운 앎이라고 했을 때 그것으로 족하다. 다른 닦음이 필요 없다. 그러면 왜 아이들은 난로가 뜨겁다고 말해줘도 만질까. 이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듣기만 한 것이다.”


▶사회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데 한국불교는 과거를 답습하면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
“공부를 안 하는 스님들이 많다. 자비심도 부족하다. 산을 오르다가 절에 들러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면 과연 불교를 알고 하는 법문인지 한심할 때가 있다. 무지한 스님과 몽매한 대중들의 만남이랄까. 이것이 한국불교의 수준이다. 스님들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회복해야 한다. 대중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경전 못지않게 사람을 공부해야 한다. 정신분석학 같은 학문도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을 이해하고 고통을 덜어주고 품어줄 수 있다. 대중들의 지적 수준이 급속하게 높아졌다. 아직도 절이나 하라는 식의 불교는 버려야 한다.”


▶조계종이 선종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사교입선(捨敎入禪) 아닌가. 그래서 무지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보조 스님의 고민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보조 스님은 당시 스님들에게 무지한데 난폭함을 깨달음의 징표라 생각하고 몽둥이질이나 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를 치선(癡禪)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선이다. 보조 스님의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등을 보면 돈오돈수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말한다. 현실적인 고민이 있었던 거다. 깨달았다고 주장만 하지 말고 공부 좀 하라는 말이다. 선불교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내기가 어렵다. 객관적인 평가 잣대가 없다. 교종은 시험이라도 보는데 선종은 그게 안 된다. 인가라는 것도 개별적이다. 결국 스스로를 속이면 안 된다. 지금 조계종은 선의 정신, 즉 마조, 황벽, 백장, 임제로 내려오는 그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만약 불교가 의타종교나 초월종교였다면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 선불교의 정신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다. 교단을 비판하고 부정을 해도 흠이 되지 않는다. 이런 비판정신, 자유로움이 있기에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요즘 불교 힐링이 인기다. 힐링 열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스님들이 좀 기다려야 한다. 처소에 진득하게 앉아있으면서 스스로 고통을 들고 온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한다. 저자거리로 나가서 이런 고통 저런 고통이 있으니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떠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의사가 병원에 있어야지 거리에 나와 있으면 자칫 병을 파는 사람이 되기 쉽다. 오히려 공포감만 조성된다.”


▶그렇다면 불교가 사회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나.
“강제로 소통하면 폭력이다. 요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개인의 실존적인 고통이라기보다 대부분 불합리한 사회구조로부터 오는 고통이다. 자본과 권력에 의한 고통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대표적이다. 지금 청년들이 겪는 고통은 실존의 고통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박탈감에서 오는 아픔이다. 이런 사회적인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 보다 큰마음, 자비로운 마음으로 불평등하고 억압된 사회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불평등한 사회구조로부터 오는 고통을 자꾸 개인의 고통으로 돌아보게 하면 안 된다. 이러면 진실이 가린다. 사람들이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는 것. 이것이 불교가 사회와 소통하는 길이다.”

 

▶존경하거나 롤 모델로 생각하는 불교인이 있나.
“나가르주나, 원효, 임제 스님. 세 분을 좋아한다. 특히 나가르주나를 가장 좋아하는데 자신도 베일 각오로 칼을 만드는 그 냉철함에 항상 감탄한다. 데이비드 흄(1711~1776)이란 철학자의 글을 읽다 나가르주나 ‘관인연품(觀因緣品)’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흄보다 한참을 더 깊이 들어가 있었다. 거대한 산맥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 깊이가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지금은 ‘중론’을 편하게 읽는다. 그래도 항상 새롭다.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깊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렇더라도 기질적으로는 임제 스님과 많이 닮았다. 강의 때 임제 스님처럼 사람들을 격동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대중적으로 써 보고 싶은 불교 책이 있는가.
“‘임제록’을 대중적으로 써보고 싶다. 나가르주나의 ‘중론’도 써보고 싶다. 조바심도 있다. ‘중론’이나 ‘임제록’에 나름의 통찰을 갖기까지 20년이 걸렸다. 그래서 성과들을 정리해서 대중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기회를 가지려고 한다. 초창기에 불교와 관련된 책들을 쓰지 않았지만 이제 인연이 온 것 같다. 불교는 만만치 않다. 궁극적으로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때 불교를 볼 수 있게 된다.”


▶하루에 2~3개의 강의를 소화하고,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대중적인 인문서적을 펴내고 있다. 왕성한 활동력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대중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많이 주고 싶다. 몇 년 전부터 갑자기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그렇지만 5~6년 정도면 그 열기가 식을 것이다. 그 전에 부지런히 알려야 한다. 유통기한 동안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죽을 때 이제 푹 쉬어야지하고 미련 없이 떠나려고 한다. 불교와 관련된 일은 앞으로 많이 해보려고 한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이 글은 법보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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