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산위의마을 촌장 박기호 신부 사진 조현
종교인들의 문제나 교회 내 갈등이 종종 세간의 화제다. 그 때마다 필자는 김수환 추기경이 생존 시 사제피정에서 했던 말씀을 회상하곤 한다.
“세계적으로 한국만큼 사제생활 하기 좋은 나라가 없다고 해요. 외국인 선교사가 내게 말하기를, ‘한국은 성직자 생활의 파라다이스다!’ 하더라고. 정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부족해서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 국민들의 종교에 대한 공경심과 교직자에 대한 우대의 정서는 남다른 전통이다. 그것은 종교다원주의에서 마치 종교 엑스포를 이룰 만큼 성장하게 만든 배경이자 동시에 다종화 대형화 기업화 하는 부정적 현상의 환경이라고도 생각된다.
근래 한국의 종교사회는 지성의 뭇매를 맞고 있다. 종교 자체가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종교 교직자, 지도자들의 생활과 운영과 이념적 태도들이 그 대상으로 보인다. 인터넷 등 새로운 환경으로 불특정 다수의 견해가 여과도 예의도 없이 출몰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원천적 사실들까지 관면 받을 수는 없다. 폭로와 질책으로 상처받고 권위가 망가지는 것은 물론 두려움의 위협도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비판하고 질책한다는 것은 애증을 전제로 한 것이니 무관심보다 더 무섭기야 하겠는가? 종교인에 대한 지탄을 넘어 종교 자체에 대한 무관심의 계절이 올 것만 같다. 이 준엄한 죄업을 무엇으로 감당할 것인고. 두렵다!
동서고금의 종교 역사가 늘 그런 질곡과 부침의 궤적을 가지고 있다. 민중 혁명의 불세례를 받아 개처럼 패대기 당해 쫓겨나기도 했고 더러는 처형도 당했다. 교단에서는 ‘증거와 순교의 역사’로 미화할 수야 있겠지만 그건 궁색하다. 종교가 권력과 부자의 편에서 억압과 불평등을 동조 방관했던 태도에 대한 심판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더러는 민중의 희망과 신뢰의 유일한 의지처가 되어준 역사도 있다.
마하비라, 공자, 석가, 예수, 모하멧에서 현대 종단까지, 종교의 숭조들은 역사의 실존 인물이면서 동시에 시대가 낳은 정신이기도 하다. 사회적 삶이 도탄에 빠지고 순리가 부정되는 현상이 지속될 때는 어김없이 예언자와 성현과 선각과 큰 스승들이 나타났었다.
종교 지도자라면 모름지기 시대 현상에 나타난 영적 정신적, 문화적 징표를 읽는 영성의 눈을 가져야 대안의 지혜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니 그 영성을 얻으려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다. 무욕과 청빈에 담긴 영성의 삶은 재물이나 권력 명예와는 공존불가의 물건이다.
신도들은 자기 신앙을 향도하는 교직자들이 오로지 영성의 삶에 전임 진력을 요구하며 대신 수행과 증거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부담하겠다는 의무감으로 예물을 봉헌한다. 청원기복의 제물이건 건축기금이건 감사예물이건 성격은 동일하다.
시대의 징표를 읽고 회개를 외치는 예언자 기능이 종교에서 지성들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그러려고 돈 들여 공부한 것이니 마땅하고 옳은 현상이다. 문제는 시대를 읽어야 할 종교인들의 눈에 실명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수행에만 너무 전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의 향유에 정신 팔고 있기 때문일까? 따악! 내리치는 죽비 소리가 크다.
종교인이 신도의 예물을 받을 때라면 늘 자신이 받은 돈의 성격을 관상(觀想)해볼 의무가 있다. 돈에는 초상화의 눈이 있고 혼이 담겨 있다. 신자가 땀 흘려 노동하여 내는 예물의 혼과 부정한 재물에서 떼어내 바치는 돈의 혼이 결코 같지 않다. 부와 권력을 가진 상류 인텔리 계층의 신자가 내는 예물에는 그들의 혼과 소망이 담겨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와 파출부와 편의점 알바를 하는 젊은이가 내는 예물에는 그들의 눈물과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물레를 돌리는 간디
그들은 신의 제단 앞에서 공평하다. 모두가 한 분 아버지의 자녀이고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다른 것은 예물의 금액이다. 교직자들은 과연 그들 모두를 형제로서 공평하게 대할 수 있을까? 누구를 편들게 되어 있을까? 정답은 ‘평소에 누구와 더 자주 만나고 식탁에 자주 앉고 값진 선물을 자주 받는가?’ 이다. 두 형제 중에 누구의 소망과 정서가 교직자의 마음을 얻고 뼈 속까지 차지할 것 같은가? 이것은 종교인들의 불편한 진실이다.
이렇게 해서 같은 교단의 교직자로서 운명이 갈라지는데, 어떤 이는 체육관처럼 모인 신도들 앞에서 진보 좌파를 신앙의 적으로 선포하는 열광적인 설교를 하고, 외제 승용차와 고급 레스토랑의 고품격 식사를 대접받고 최고 상류층과 교재 한다. 그들은 교직자의 기념일을 잘 기억하고 축하해 주는 정성도 있다. 반면에 어떤 교직자는 주일인데도 겨우 얼마 안 되는 소수의 신도들과 예배를 드리며 북녘 동포 돕기 저금통을 돌리고, 잔치국수를 나누어 먹고 헤어진다. 그런데 신자들 사이에 정치적 논쟁이 생기고 선거 때가 되면 교회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가? 단, 예수에게는 중립이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의 말씀이 씨가 된 듯하다. 바오로 사도는 “대사제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고 했다. 사제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내어놓는 자다. 그래서 예수를 ‘대사제’라고 부른다. 세상과 하늘을 화해시키고자 자기 목숨을 제물로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종교인들은 자신의 결정권과 명예와 소유는 결코 내려놓지 않고 외려 대물림까지 하려 든다. 신도들에게는 헌신과 헌납을 독려하지만 스스로는 자신을 내어 놓지 않는다.
인도의 간디는 “나는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하면서, 희생 없는 제사, 헌신 없는 종교를 ‘사회악’이라 지탄하였다. 예수와 그 추종의 집회 사이에 큰 간극이 벌어져 있음을 통박하는 말이다. 이미 70여 년 전 간디의 생각일진데 오늘날 우리 종교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는데 왜 이렇게도 낯부끄럽고 민망스러운가?
우리 사회는 정신세계의 붕괴로 인한 중증 질환으로 신음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의 착취와 압제가 진군한다. 성과주의 사회의 피로 누적과 좌절감으로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닌 집단 우울증과 자살이 집단 증후군을 이루고 있다. 물신의 우상과 향락과 명품주의 소비문화로 영혼과 정신을 포박하고 가위 누르는 악령의 손길이 바이러스처럼 창궐하고 있다.
대가족과 노동의 삶은 해체되어 집은 있어도 삶이 없고 가족은 있어도 가정이 없다. 시민의 권리와 자유는 있으되 책임은 없다. 공동체적 가치들이 샅샅이 해체되고 있다. 남북분단에 동서로 갈라지고, 보혁 빈부(保革 貧富)로, 명문 학벌주의와 지역우월주의로 갈라져 투석전을 벌이는 시대, 이념도 사상도 아닌 막연한 편견과 감성적 선정적 호불호의 아집으로 정치의식이 파멸을 맞고 있다. 천명을 받든 종교인이라면 잠을 이룰 수 없는 시국일진데 기껏 생활 태도를 놓고 다툼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참담하지 않는가? 이건 정말 낭패다!
어디서부터 문제일까? 바둑에는 복기라는 것이 있다. 수를 잘못 읽은 지점을 찾는 것이다. 존경도 받고 제물도 받는 것에 익숙해지고 관성에 빠져 자기다움과 목적성을 잃어버린 문제로 보인다. 종교가 종교다움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더 이상 존재이유가 없는 사형선고다. 존재할 이유도 없는 것이 성장을 계속하면 괴물 밖에 더될까? 어떤 이는 영상에 등장한 모습이 실제 괴물로 보였다는 이도 있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 낙원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살게 하였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만족의 유혹에 넘어가 파라다이스의 완성을 추구했고, 즉시 추방당했다. 바벨탑도 소돔과 고모라 도시도 모두 자신들의 천국을 누리고자 함에 내린 재앙이었다. 종교인은 종교를 파라다이스로 여기는 순간 타락이란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간디의 일곱 가지 사회악, 그 어떤 사회적 가치도 인간 삶의 발전에 기여하는 목적성을 잃어버리면 악의 기능만 남는다는 훈화를 기억해 두자.
근본으로 돌아가자!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는 희생과 헌신에 종교의 정체성이 빛난다. 거듭남을 위해 살을 깎는 각오는 그 자체로 고행이다. 그러나 고행 극기란 모든 종교의 필수적 전통이며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 종교의 거듭남의비방(秘方)으로 ‘100일 동안 쑥만 먹어야 한다!’ 면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사는 길이다.